스릴러 형식에 소설 ‘죄와 벌’을 접목한 연극 ‘루시드 드림’. 가운데 책상에 앉은 변호사 최현석(이남희)이 ‘죄와
벌’의 독자로 그 책을 읽어감에 따라 그 오른쪽의 연쇄살인범 이동원(정승길)은 라스콜리니코프로, 그 왼쪽 침대에 앉은
마담(길해연)은 소냐로 형상화된다. 사진 제공 극단 청우
‘죄와 벌’에서 시작된 살인 스릴러에 고전 접목 ‘구원’ 시각엔 아쉬움
모든 살인은 단 한 권의 책에서 시작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이다.
승률 100%를 자랑하는 변호사 최현석(이남희)은 10여 년 전 법대 선배에게 선물했던 이 책이 뜻밖에 돌아오면서 소름끼치는 진실에 접근한다. 책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이름을 지우고 그 위에 적힌 이동원이라는 이름. 선배가 죽기 전 변호를 맡았던 연쇄살인범이다. 자석에 끌리듯 이동원(정승길)의 변호를 맡은 최현석은 “내 운명에 살인이 허락되는지 알고 싶었다”는 이동원의 수수께끼 같은 살인동기에 매료된다. 알 듯 모를 듯한 이동원의 내면을 탐험하던 최현석은 어느새 자신의 머릿속 동굴로 들어선다.
무대는 셋으로 나뉜다. 가운데는 최현석의 책상이 놓인 공간. 그의 내밀한 독백이 이뤄지는 ‘생각의 방’이다. 오른쪽은 13명을 살해한 이동원과 팽팽한 대결이 펼쳐지는 교도소 접견실. 왼쪽은 최현석의 비밀을 공유한 내연의 여인 마담(길해연)의 침실이다.
극 초반에는 최현석의 공간과 이동원의 공간만이 번갈아 조명을 받는다.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마담의 공간에 빛이 드는 순간은 이동원의 살인이 ‘죄와 벌’로 인해 촉발됐음을 최현석이 깨달은 직후다. 2만 권의 책을 독파한 이동원은 ‘인간에겐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라스콜리니코프의 신념을 실험해 보기 위해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한 방식으로 무차별 살육을 벌인 것이다. 이동원은 그렇게 자신의 ‘생각의 캐비닛’에 접근하는 최현석의 귀에 속삭인다. “변호사님의 생각의 캐비닛이 궁금해요.”
마담의 침실에 불이 들어오는 것은 그 순간이다. 마담은 최현석의 살인본능을 일깨우는 존재, 즉 라스콜리니코프가 살해한 전당포 노파를 연상시킨다. 최현석이 마담에게 자신의 비밀과 청춘을 저당 잡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극이 전개되면서 마담이야말로 오히려 구원의 여인이었음이 드러난다.
이로써 삼분된 무대구조의 의미가 뚜렷해진다. 이동원이 죄인 라스콜리니코프라면 마담은 라스콜리니코프를 구원한 창녀 소냐다. 그렇다면 그 가운데에 위치한 최현석은 누구인가. 그 순간부터 연극의 중심은 이동원에서 최현석으로 전이된다.
차근호 작가와 극단 청우 김광보 연출이 만난 ‘루시드 드림’은 스릴러의 재미와 인문학적 깊이를 함께 갖춘 창작극이다. 스릴러의 내용엔 에드워드 노턴이 주연한 영화의 향기가 물씬하다. 변호사를 꼭두각시처럼 조종하는 살인마의 이야기는 ‘프라이멀 피어’를 닮았고, 이동원이 최현석의 ‘생각의 방’에 침투하는 이야기는 영화 속 두 주인공이 실제론 동일인의 분열된 두 자아라는 ‘파이트 클럽’을 닮았다. 그러나 여기에 ‘죄와 벌’이란 고전을 접목시킴으로써 독창적 분위기를 끌어냈다.
연극의 제목은 자신이 꿈꾸고 있음을 깨달은 상태에서 꾸는 자각몽(自覺夢)을 뜻한다. 인생이 한바탕 꿈이라면 자각몽을 꾸는 이에겐 무엇이든 허용된다. 소수의 선택받은 인간에겐 살인마저 가능하다던 라스콜리니코프의 생각이 실현되는 시공간이다. “이 세상은 신호등도 차선도 없으며 중앙선도 횡단보도도 없는, 그저 막막한 도로일 뿐. 아무것도 없는 도로만 내 앞에 있다”는 이동원의 대사는 그런 무한자유론의 절망적 비전이다. 그것은 다시 ‘소냐 없는 라스콜리니코프’로 형상화된다.
그러나 이 같은 독해는 기독교적 구원에 대한 이해 없이 도스토옙스키를 읽을 때 발생한다. 기독교적 구원은 라스콜리니코프-이동원-최현석으로 전염되는 모방의 연쇄를 자기희생을 통해 끊어내는 것이다. 자각몽이 한 번에 그친다면 이동원의 선택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매번 동일한 자각몽이 끊임없이 반복된다면 어떤 선택을 내릴 것인가. 무릇 고전이란 반복해 읽을 때 제 맛이 나는 법이다. 2만 원. 31일까지 서울 마포구 서교동 산울림소극장. 02-334-5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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