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는) 조선의 황량한 예원(藝苑)을 개척하야 백화난만(百花爛.)한 예원을 성(成)하랴는 이상(理想) 하에서 특히 ‘녯
것은 멸(滅)하고 시대는 변하얏다. 내 생명은 폐허로부터 온다’는 독일 시인 실레르의 싯구를 취하야 본지의 제목을 작(作)한 바
예술잡지라.” ―동아일보 1920년 8월 3일자》 창조 폐허 백조 등 문예-종합誌봇물 ‘개벽’ 첫호부터 수난
국내에서 한국인이 발간한 첫 잡지는 1896년 11월 30일 독립협회가 창간한 반월간지 ‘대죠션독립협회회보’였다. 잡지가 대중들에게 익숙해지기 시작한 것은 1900년대 들어서였다. 당시 두드러진 역할을 했던 인물은 육당 최남선이었다. 그는 ‘소년’(1908), ‘새별’(1913), ‘청춘’(1914) 등을 창간했다.
잡지는 문예지에 힘입어 1920년대 본격적으로 활성화됐다. 최초의 문예지 ‘창조’(1919년 2월)에 이어 ‘폐허’(1920년 7월) ‘장미촌’(1921년 5월) ‘백조’(1922년 1월) ‘금성’(1923년 1월) 등이 등장하면서 문학잡지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이 시대 문예지의 제목을 보면 낭만적이다. 여기엔 시대적 아픔이 담겨 있다. ‘백조’에 참여했던 월탄 박종화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을사와 경술의 망국한(亡國恨)을 어린 가슴속에 뼈아프도록 품어보았고…문학의 주조가 낭만과 상징 그리고 데카당스에 흐르게 된 것은 우리들이 정치적으로 압박을 받게 되는 환경 속에 서 있고…”.
1920년 6월 창간된 ‘개벽’은 대표적 종합잡지였다. 창간호 표지에 실린 포효하는 호랑이 그림에서 알 수 있듯 ‘개벽’의 주조는 항일민족정신이었다. 창간호 권두언이 이를 웅변한다.
‘아! 풍운(風雲)! 아! 벽력(霹靂)!/…/아! 흑천지로다. 수라장이로다/…/아! 총검! 아! 쇄도(殺到)!/…/평화의 소리가 높도다. 개조를 부르짖도다/…/운(運)이 래(來)함이냐? 시(時)가 도(到)함이냐?/아니 이것이 개벽이로다!’
일제가 그냥 있을 리 없었다. 창간호부터 판매금지 처분을 내리는 등 일제는 ‘개벽’에 대한 탄압을 그치지 않았다. 동아일보는 1922년 9월 2일자 1면에 일제를 규탄하는 사설을 실었다.
‘잡지계에 대권위로서 존립하야 오는 개벽으로 논지(論之)하면…내용의 충실한 점과 주의주장이 건전한 점과…조선민중을 위하는 충정(衷情)의 심절(深切)하는 점으로 관(觀)하야…가혹한 처분을 하(下)한 경무당국에 일언(一言)을 고(告)하야써 그 주의를 촉(促)하노라.’
개벽은 한국근대문학의 산실이기도 했다.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 현진건의 ‘빈처’, 김소월의 ‘진달래꽃’ ‘엄마야 누나야’,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이 모두 개벽을 통해 세상에 나왔다.
1920년대엔 이 밖에도 여성 종교 음악 농민 경제 과학 어린이 분야의 다양한 잡지가 창간됐고 이후 한국 잡지 발전의 자양분이 됐다. 당대의 삶과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잡지. 문화재청은 ‘폐허’ ‘백조’ 등 1920년대 문예지를 근대문화재로 보존할 계획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