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일의 썸머’는 톰(왼쪽)이 대표로 나서서 재현하는 평범한 남자들의 ‘그때 그 여자’ 회고담이다. 사진 제공 이가영화사
금요일 밤 술자리에서 몽롱해진 눈빛으로 “내가 아는 어떤 사람 얘긴데…”라며 슬그머니 꺼내놓는 연애 이야기. 십중팔구 본인 얘기다. 21일 개봉한 ‘500일의 썸머’(15세 이상 관람가). 그런 얘기다.
“이 영화는 허구이므로 ‘저거 나다’ 싶은 캐릭터가 등장해도 절대 우연입니다. 특히 당신. 제니 베크만. Bitch.”
시나리오 작가 스콧 뉴스타터가 도입부에 끼워 넣은 ‘내가 아는 어떤 사람…’ 식의 전제 내레이션. 1970년대 영화 ‘졸업’과 1980년대 인기를 모았던 영국 록 밴드 ‘더 스미스’를 좋아하는 주인공 톰(조지프 고든 레빗)은 뉴스타터의 연애 경험담을 재현하는 대리인이다.
톰은 건축가의 꿈을 포기하고 글재주를 살려 축하카드 카피라이터 일로 먹고사는 남자다. “매일 부서지는 건물을 짓느니 평생 기억에 남을 글을 쓰자고 생각했다”는 대사는 자위적 가식. 여자를 꾈 때 내미는 카드는 건축물에 대한 지식과 그림 솜씨다. 사장 비서로 입사한 썸머(주이 데샤넬)를 보고 첫눈에 반한 톰은 ‘첫눈에 반한 지 28일째’의 회식자리 대화를 계기로 그녀의 ‘친구’로 인정받는 데 성공한다.
이야기는 여기부터 MP3플레이어의 무작위 선곡 모드처럼 엮인다. 31일째. 복사기 앞에서 느닷없이 키스를 당한다. 34일째. 예비부부처럼 가구점 쇼핑을 한 뒤 집에서 첫 섹스를 한다. 87일째. 포르노 비디오를 함께 본 뒤 샤워실에서 복습을 해본다. 그래도 여자는 “애인이 아닌 친구 사이”라고 한다. 290일째. 힘들다며 헤어지잔다.
사랑에 대한 기억은 대개 무작위 모드로 리플레이 된다. ‘썸머에게 반한 지 500일째 날’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는 수다쟁이 뉴스타터가 도입부 내레이션에 굳이 덧붙였듯 ‘뻔한 로맨틱 코미디’는 아니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와 ‘예스 맨’에서 묘하게 얄미운 매력을 보였던 데샤넬은 ‘나를 미치게 만들었던 그때 그 여자’에 대한 회상에 잘 어울린다. 단물 쪽 뺀 로맨스영화 ‘주노’에 참여했던 로스앤젤레스 토박이 촬영감독 에릭 스틸버그가 현실적인 잿빛 도시의 일상적 공간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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