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에 찬 문체, 격정적인 연애담, 가족 및 가부장제에 맞서는 여성의 성적 일탈과 존재론적인 방황. 소설가 전경린 씨의 작품들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몇 가지 이미지는 신작 ‘풀밭 위의 식사’에서도 크게 다르지는 않아 보인다. 하지만 전작들에 비해서 등장인물 간의 관계는 좀 더 관조적이고 은근하다. 서사는 물 흐르듯 차분히 진행된다.
소설은 크게 한 여자와 그녀를 둘러싼 두 남자의 관계를 축으로 전개된다. 주인공 누경은 첫 만남에서부터 자신에게 운명적으로 매료당한 남자 기현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예민하고 제멋대로인 데다 사람의 마음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녀에겐 남들이 알지 못하는 상처가 있다. 그 상처의 진원에 또 다른 남자, 서강주에 대한 기억이 버티고 있다. 먼 친척 오빠뻘인 그는 어린 시절 누경네에 머물렀었다. 오랫동안 동경의 대상이었지만 다가설 수 없었던 그를 누경은 회사를 관두고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다시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곧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애초부터 원만할 수 없었다. 그의 아내가 위암 수술을 받으면서 그들은 예정된 이별을 밟아 간다.
소설은 헌신적인 기현과 매몰찬 누경의 관계와, 과거 서강주와의 기억을 오가면서 전개된다. 남자를 쉽게 사랑하지 못하는 누경에게 서강주는 최초로 그의 마음을 완전히 연 사람이었다. 사실 누경에겐 열여섯 살, 서강주의 결혼에 상심해 찾은 풀밭에서 낯선 사람에게 성폭행을 당한 끔찍한 상처가 있었다. 비록 실패한 사랑이지만, 누경은 그와의 재회로 인해 과거의 트라우마와 맞설 수 있게 된다. 소설은 이런 저간의 사정을 훑어나간 뒤 누경이 조금씩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과거와 세상의 번잡함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사는 법을 터득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기현은 그런 그녀를 한 발치 뒤에서 끝까지 지켜본다.
이 작품 안에 나오는 사랑은 하나같이 빗나가는 것들뿐이다. 때때로 안타까움, 먹먹한 비애감을 자아낸다. 하지만 청승맞거나 구슬프진 않다. 소설은 사랑이 꼭 누군가를 향해 수렴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의미 있을 수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현실의 남겨진 것들을 보듬으면서 그저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다. ‘작가의 말’에서 전 씨는 이렇게 썼다. “과거의 짐과 미래의 불안으로부터 독립해 온전하게 현재에 존재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초월적인지…평정을 유지하며 현재성 속에서 능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야말로 소박한 초인이 아닐까.” 거창한 의미나 결실 같은 건 없어도 좋다. 소설의 누군가가 말하듯 사랑도 삶도 “있었던 일 그대로 좋은 시간”일 것이므로.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