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쉬어가는 전깃줄, 매서운 칼바람 앞에서도 의연한 원색의 빨래, 이마를 서로 맞댄 슬레이트 지붕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차갑게 식은 도시락을 먹는 광부는 밥 한 숟가락의 무게를 일깨우고, 남편 잃은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의 아내는 질긴 삶의 고리를 드러낸다.
가슴이 먹먹하다. 누추한 현실이지만 밝은 기운이 또렷하게 느껴지는 그림들. 1983년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강원 태백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황재형 씨(58)의 ‘쥘 흙과 뉠 땅’전(5∼28일 서울 가나아트센터·02-720-1020)에서 만날 수 있다. ‘광부화가’ ‘탄광촌의 화가’로 불리는 그의 2007년 개인전에 비해 그림이 더 정겹고 환하고 따스하다.
“좀 더 많은 것을 받아들이게 됐다. 아마 철이 든 거다.”
예전엔 상처부터 봤다면 지금은 담 밑의 채송화가 눈에 먼저 들어온다. 시계 초침 소리가 촉박하게 들리지 않고 텃밭의 따지 않은 고추가 아름다워 보인다. 관념적 유희에서 벗어나자 마음자리가 넉넉해졌다. “노동자는 정당하다에서 인간의 삶은 누구나 정당하다로 더 넓게 보게 됐다.”
오래 끌어안은 그림을 추스르고 신작을 보태 60여 점을 선보인다. 생명의 존엄성, 시대정신에 대한 관심은 여전하지만 한층 무르익은 그림이 묵직한 울림을 길어올린다. 6일 ‘작가와 함께하는 아트 브런치’ 행사도 열린다. “현실이 아무리 막막해도
내 삶의 터는 긍정하자”
거칠지만 단단한 감동
○ 그림-인간에 대한 애정
전시 제목은 1984년 첫 개인전 이후 종종 쓰고 있다. ‘쥘 흙은 있어도 누울 땅은 없는’ 사람들. 탄광촌의 암울한 풍경에 궁핍하지만 건강한 노동의 삶을 소재로 한 작품은 거칠지만 단단한 감동을 일깨운다.
“인조미끼와 선탄부를 그린 작품이 있다. 선탄부는 세 개의 하늘을 본다고 한다. 남편이 광부가 되려고 태백에 와서 처음 본 시퍼런 하늘, 막장에서 만난 시커먼 하늘, 남편이 사고로 죽은 뒤 자기가 보는 막막한 하늘. 인조미끼는 욕망의 끈을 상징한다. 우리는 그 자체로 온전한데 헛것을 동경하는 데서 슬픔이 시작된다.”
탄광이 문을 닫자 썰물처럼 빠져나간 사람들. 그 빈자리를 화가는 마을과 자연 풍경으로 채워나간다. “광부의 표정은 곧 집의 표정이다. 또 산의 표정이다. 산의 표정은 그곳 사람들의 표정이다. 사람은 산을 닮고 산은 사람을 닮았다.”
현실은 각박해도 내 삶의 터를 긍정하자는 화가는 ‘해토머리’란 작품을 언급했다. “얼음이 녹는 것은 사람의 인내력 때문이다. 시간이 아니라 모든 것을 감수하는 인내력이 봄을 가져온다. 삶을 이겨낸 자들의 행복의 터, 숨결을 드러내고 싶다.”
‘그의 그림은 대상의 묘사가 아니다. 화면 전체에 흐르는 형태의 힘, 침묵의 무게, 존재의 진정성 같은 것을 담아내려고 노력하는 흔적이 역력하다’는 평가에도 그는 겸손하다. “리얼리스트로 존재하고 싶다. 내 작품은 설사 예술성이 없어도 기록성은 가질 것이다.”
○ 삶-인간에 대한 예의
그림의 내면적 진실은 손재주가 아닌, 삶에서 나온다. 그는 빠듯한 작업시간을 아껴가며 13년 동안 미술교사 연수를 열고 있다. 한동안 탄광촌 학교에서 아이를 가르쳤는데 학년이 바뀌면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시작한 일이다.
“태백에 와 2년쯤 지났을 때 ‘버려진 아이가 있다, 당신이 꼭 가르쳐야 한다’고 해서 찾아간 집. 방문을 여니 살 썩는 냄새와 대소변 냄새가 진동하는데 한 아이가 기어 나왔다. 부모가 일하러 나간 사이 언니가 땅바닥에 떨어뜨려 하반신을 못 쓰게 된 희숙이였다.”
아이를 가르치며 배운 게 더 많았다. 미술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그동안 실속 없는 미술을 했다는 반성과 함께 장애인교육센터를 만들어 운영했다.
“예술가라고 자기 삶에만 함몰돼선 안 된다. 내가 입은 옷은 누가 만들고 쌀과 김치는 어디서 왔는가. 내가 존재하는 삶은 지역사회의 땀을 바탕으로 이뤄진다.”
사회의식에 지배되는 종속적 미술운동이 아닌, 자신이 갖는 고유의 정신성을 사회와 연대하자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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