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인(吾人)은 타국어를 학득(學得)하는 노력을 이(移)하야 공통어 학득에 사용하기를 희망하며 될 수 잇는 대로 차(此)
학득하기 용이한 에스페란토를 가정에서부터 아동에게 교수(敎授)하기를 희망하노라… 차 국제적 용어가 비록 인공물이나 일반사회의
용어가 되고 또한 편리하면 결국 자연발달하야 세계문화 증진에 다대(多大)한 공헌이 유(有)할 것은 물론이라. 오인은 조선인이 차
운동에 참가하기를 희망하노라.” ―동아일보 1921년 9월 5일자》
세계공용어 첫 등장 시인 김억 적극 도입 “인공언어” 반발도
민족들 간에 언어가 달라서 생기는 문제는 단지 의사소통의 불편에 그치지 않았다. 말이 안 통하다 보니 이웃한 민족끼리 적대시하는 일도 잦았다. 1859년 폴란드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폴란드인, 독일인, 러시아인, 유대인 등 4개 민족이 모여 사는 도시 비아위스토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루드비크 자멘호프. 그는 어떠한 언어도 우위를 갖지 않으면서 서로 다른 민족들 사이에 대화가 통하는 평화로운 세상을 꿈꿨다. 뒷날 안과의사가 된 자멘호프는 1887년 ‘세계 공용어’를 만들어 발표했다. 세계에서 처음 실용화에 성공한 이 인공 언어의 이름은 ‘희망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에스페란토’였다.
일본에서 에스페란토를 배운 시인 김억은 1920년 YMCA에서 강습회를 열면서 에스페란토를 보급하기 시작했다. 그를 중심으로 조선에스페란토협회가 생겼고 수강생이던 신봉조는 에스페란토 교재를 만들었다. 김억은 1920년 발간된 잡지 ‘폐허’의 창간호에 에스페란토로 쓴 시를 발표했다. 1930년대까지 김동인의 ‘감자’ 등 단편소설을 에스페란토로 번역하기도 했다.
동아일보에도 에스페란토 강습회를 알리는 기사가 여러 차례 실렸다. 1924년에는 매주 1회씩 모두 47회에 걸쳐 에스페란토 고정란을 게재해 에스페란토의 대중화를 도모했다.
1921년 9월 5일 동아일보는 “국제연맹이 성립하야 세계의 협조를 도모하고 군비제한회의를 개최하야 세계의 평화를 도모할지라도 그 회의 용어에 대하야 문명 각국이 쟁투병시(爭鬪病視)하는 현상으로는 그 소기의 평화가 아즉 요원한 것을 오인은 가히 알겟도다”라고 전하며 세계 평화주의에 입각한 에스페란토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에스페란토 사용에 반대하는 사람도 나왔다. 동아일보는 1930년 4월 ‘에쓰페란토 문학’을 6회에 걸쳐 연재했다. 첫 회인 1930년 4월 8일자에는 “에쓰페란토어가 자연어의 그것과 가티 문예품을 제작할 만한 표현능과 생명과 정신이 잇슬가 하며 의심하는 이가 만습니다”라며 인공 언어에 회의적인 목소리를 전했다.
1975년 국내 에스페란토 단체들이 통합해 한국에스페란토협회가 생겼다. 1991년 설립한 에스페란토문화원에서 에스페란토를 가르치고 있다. 에스페란토문화원에 따르면 에스페란토로 웬만큼 대화가 가능한 사람은 전 세계 300만 명, 국내 200명 정도로 추산된다. 그러나 자멘호프가 꿈꾼 국제어의 기능은 오늘날 영어가 떠맡게 됐다. 자녀의 영어 교육을 위해 가족을 영어권 국가로 보낸 ‘기러기 아빠’도 흔히 볼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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