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화요일, 수유시장엔 ‘책수레’가 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2월 3일 03시 00분


■ 문화부 ‘문화를 통한 전통시장 활성화 시범사업’ 현장

점포 찾아다니며 무료대출
“책 읽을 시간 없어 아쉬웠는데
장사 스트레스도 싹 풀려
책얘기 나누니 소통도 저절로”

매주 화요일 서울 강북구 수유시장에 책수레가 나타나면 시장은 한바탕 책과 문학의 마당으로 바뀐다. 2일도 마찬가지였다.
수유마을시장 프로젝트팀의 책수레 담당자 남미영 씨, 세계상회의 박순희 씨, 책수레 담당자 이지선 씨, 꽃가게 제일화원의 도춘자
씨(왼쪽부터) 등 책을 빌리는 사람, 빌려주는 사람 모두 표정이 밝다. 이훈구 기자
매주 화요일 서울 강북구 수유시장에 책수레가 나타나면 시장은 한바탕 책과 문학의 마당으로 바뀐다. 2일도 마찬가지였다. 수유마을시장 프로젝트팀의 책수레 담당자 남미영 씨, 세계상회의 박순희 씨, 책수레 담당자 이지선 씨, 꽃가게 제일화원의 도춘자 씨(왼쪽부터) 등 책을 빌리는 사람, 빌려주는 사람 모두 표정이 밝다. 이훈구 기자
“시장에 책이 돌아다니네!”

2일 오전 11시 서울 강북구 수유시장. 200여 권의 책으로 가득 찬 책수레가 다닥다닥 붙은 점포 사이를 지나다니기 시작했다. 시장 사람들은 신기한 듯 책수레 주위를 기웃거렸다.

끌고 다니기에는 만만찮은 무게인 데다 길이 좁아 여러 번 삐걱거리지만 수레를 끄는 두 20대 여성의 얼굴엔 힘든 기색이 전혀 없다. 책수레가 지나갈 때마다 잡화상, 아동복, 안경점, 꽃집, 한복점 주인들이 반색을 하며 이들을 맞아 주기 때문이다. “추운 날 수고한다” “좋은 일 한다”고 인사하는 상인, 홍삼 음료를 건네는 상인도 있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문화를 통한 전통시장 활성화 시범사업’에 선정된 수유마을시장 프로젝트 가운데 책 대출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 이름은 ‘가게를 여행하는 책’으로, 지난해 8월 시작됐다. 수유마을시장 프로젝트팀의 남미영(28) 이지선 씨(26)가 수유시장 상인들에게 무료로 책을 빌려 주기 위해 매주 화요일 책수레를 끌고 110여 개 점포를 돌아다닌다. 프로젝트팀은 무용 강습, 외국어 강좌 등 다양한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책수레 대출용 도서는 시민이나 한국도서관협회 등에서 기증한 것으로, 대부분 문학책이다. 이날 수유시장에선 문학이 시장의 일상을 바꿔놓는 풍경이 벌어졌다. 이번 주에 빌릴 책을 고르는 상인들 사이에서 다양한 문학 이야기가 오갔기 때문이다. 상인들은 하일지 작가의 신작 ‘우주피스 공화국’의 난해함, 한비야 씨의 산문집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이 주는 긍정의 힘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금은방 ‘정확당’ 사장 서영희 씨(61)와 딸 전영미 씨(42)는 도서대출 상담에 한창이었다. 서 씨가 지난주에 빌렸던 이외수 씨의 ‘황금비늘’을 반납하며 “연애나 애정 이야기가 담긴 소설은 없냐”고 묻자 담당자인 이 씨는 김창동 씨의 ‘사랑에는 향기가 없다’, 은희경 씨의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를 추천했다. 잠시 후 딸 전 씨는 금은방에서 ‘문화통장’을 들고 나왔다. 상인들은 책을 대출할 때마다 통장에 기입하고 확인 도장을 받는다. 전 씨는 책수레와 문화통장이 ‘삶의 활력소’가 된다고 했다. “상인들은 한 달에 두 번 정도밖에 쉬지 못하는데 그때 시간 내서 서점에 가는 게 쉽지 않아요. 이렇게 직접 찾아오니 한 권이라도 더 보게 되는 거죠. 지식이나 교양을 쌓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책에 몰입하고 나면 장사로 받는 스트레스가 다 풀리는 것 같아요.”

마을 서점들이 자취를 감추고 있는 상황에서 책수레는 수유시장 상인들이 책을 손쉽게 접할 수 있는 통로다. 40년 넘게 꽃집을 운영하는 도춘자 씨(75)는 “시장 근처에 책을 파는 곳이 전부 사라져서 너무 아쉬웠는데 책수레 덕분에 여가를 더없이 알차게 보낼 수 있게 됐다”고 전했다. 옆에 있던 세계상회의 박순희 씨(62)는 “책을 읽으니 애쓰지 않아도 두뇌회전이 되고 여유가 생긴다”고 거들었다.

현재 책수레는 수유시장 전역을 다니지는 못한다. 전체 700여 개 점포가 모인 수유시장은 건물시장, 재래시장, 골목시장으로 이뤄져 있다. 수레를 끌고 다니기에 길이 고르지 않아 일단 건물시장 안 점포만 방문한다.

책수레는 수유시장 사람들에게 소통의 창구가 되기도 한다. 책수레를 끄는 남 씨는 “책이란 것이 상당히 개인적인 매체라고 생각했는데 시장 상인들이 책을 통해 서로 얘기하고 교류를 늘려나가는 것을 체감하고 있다”고 전했다.

프로젝트팀은 책수레의 방문 범위를 넓히고 시장을 찾은 시민들도 책을 빌려갈 수 있도록 시장에 작은 도서관도 만들 계획이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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