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내수동 교보문고 본사의 대표이사 집무실 옆 접견실에는 친숙한 문구의 액자가 걸려 있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교보문고 창립자인 고 신용호 회장이 한 말이다. 이 정신을 바탕으로 설립된 교보문고가 올해로 창립 30주년을 맞아 새로운 변화를 꾀하고 있다. 전용 단말기를 내놓으며 전자책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고, 4월부터 5개월간 종로구 광화문점 문을 닫고 내부를 고친다.
창립 멤버로 30년 역사를 함께해온 김성룡 대표를 4일 만나 교보문고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의 청사진에 대해 들어봤다.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8일부터 판매되는 전자책 전용 단말기. 김 대표는 “교보가 갖고 있는 콘텐츠 6만5000여 종을 무선으로 내려받을 수 있는 기기”라면서 “교보를 필두로 많은 단말기가 나오는 올해는 전자책 원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자책의 활성화가 종이책과 오프라인 서점에 해를 끼치지 않을까’라는 질문에 김 대표는 “전자책은 종이책의 대체재가 아니라 보완재”라고 단언했다.
“전자책은 아직 종이책의 내용을 옮겨 담는 초보 단계입니다. 하지만 휴대전화 소설의 예에서 보듯 새로운 미디어에 맞는 새 콘텐츠가 생겨날 것으로 예상합니다. 또 독서의 채널이 넓어져 독자가 확대될 것이기 때문에 전자책이 종이책 독자를 뺏는 게 아닙니다.”
더 나아가 오프라인 서점은 고유의 장점 덕분에 생명력을 유지할 것이라고 김 대표는 확신했다. 그는 “책방에 오는 고객의 70%는 읽을 만한 책이 있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온다”고 말했다. 한가로이 이 책 저 책을 보다가 자신에게 딱 맞는 책을 찾았을 때의 기쁨, 그리고 그 책을 읽은 뒤 얻는 충만함은 온라인 서점에선 누릴 수 없는 호사라는 것이다.
광화문점 본점 재단장도 오프라인의 장점을 강화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고 김 대표는 밝혔다. 서로 다른 분야를 섞는 ‘통섭’ 방식의 진열도 시도하고, 음반 매장은 조금 축소할 방침이다. 재개장 이후로는 북마스터의 ‘추천’ 기능을 강화할 계획이다. 김 대표는 “베스트셀러에 가려진 책들을 우리가 먼저 읽고, 가치를 끌어내 필요한 분들께 전달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광화문점 재단장은 1991년에 이어 두 번째다. 1년 작업 끝에 1992년 5월 30일 다시 문을 열었을 때는 당일 찾은 고객만 11만 명에 이르렀다.
김 대표는 외국서적 담당 직원으로 교보문고 일을 시작했다. 30년의 변화는 외서 코너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는 “외서수입과장 때 해외에 주문한 책이 2년 만에 온 적도 있다”면서 “이제는 며칠 만에 오는 건 물론이고 출판되기 전에 책의 정보도 알 수 있어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밝혔다.
그가 주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얘기는 “좋은 책을 소개해 달라”는 것. 그러나 김 대표는 절대 책을 추천하지 않는다.
“좋은 책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냥 읽고 싶은 책을 읽으라고 말합니다. 읽다 보면 책이 스스로 선생이 돼 다른 책을 연결해줍니다. 무엇이건 우선 읽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그는 ‘책방’ ‘책장사’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다. 김 대표는 “미사여구 다 걷어내면 우리가 하는 일은 책방이고, 책장사다”라면서 “교보문고는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죽비소리 삼아 좋은 책이 많은 사람에게 읽히도록 오래오래 책장사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통신판매… 회원제… 서점문화 바꿔온 30년▼
“서울 광화문의 교보문고는 서점의 대형화 경향을 부채질해서 서울에서는 종로의 종로서적과 쌍벽을 이루어 서점가의 새로운 풍토를 조성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한국출판연감’은 교보문고의 출현을 이렇게 기록했다. 교보문고는 외국서적 분야에서 특히 강점을 가졌다. 김성룡 대표는 “당시 지식인들은 시내에 나오면 꼭 교보문고를 찾았고 특히 외서 코너를 들렀다”고 회고했다.
교보문고는 ‘처음’이라는 기록을 늘 달고 다녔다. 1989년 PC 통신을 활용한 통신판매제도 도입, 1993년 회원제 북클럽 발족, 1995년 고객모니터제 실시 등에 이어 1997년에는 인터넷서점을 최초로 열었다. 완전 개가식으로 매장을 꾸민 것도 1980년대에는 파격이었다.
대표적인 지식문화 공간으로 자리 잡은 뒤로는 외국 손님들의 단골 방문처가 됐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 씨 등이 다녀갔고 외환위기 때는 외국 정부 관계자가 교보문고에 붐비는 젊은이들을 보고 “대한민국의 미래는 걱정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교보문고는 서점 이상의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부모는 자녀 손을 잡고 교보문고로 나들이를 했고 젊은이들은 약속 장소로 활용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낸 한 주부가 최근 1만 원권 지폐 한 장을 동봉한 편지를 교보문고에 보내왔다. “주부가 되기까지 공짜 책 많이 봤다. 이렇게라도 신세를 갚는다”는 내용이었다.
30년 동안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교보문고는 전국에 지점을 열 때마다 중소 서점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최근에도 서울 영등포점을 열면서 지역 서점들과 마찰을 빚었고 결국 중소기업청의 강제조정안을 받아들여 초중고교 학습참고서를 매장에서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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