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대본-연출-연기 3박자… 깊은 맛, 긴 여운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2월 9일 03시 00분


연극 ‘에이미’
대본 ★★★★☆ 연출 ★★★★ 연기 ★★★★☆

옛것-새것 문화사적 충돌
짜임새 있게 그려내
오랜만에 맛본 연극의 진수

연극의 종말이 운위되는 시대에 진짜 연극의 맛을 보여준 ‘에이미’. 왼쪽부터 윤소정 서은경 김영민 씨. 사진 제공 여유작
연극의 종말이 운위되는 시대에 진짜 연극의 맛을 보여준 ‘에이미’. 왼쪽부터 윤소정 서은경 김영민 씨. 사진 제공 여유작
오랜만에 대본 연출 연기 3박자를 갖춘 연극을 만났다. 영국 현대극작가인 데이비드 헤어 원작의 ‘에이미’(연출 최용훈)다. 영국의 한 예술가 집안을 무대로 ‘옛것’과 ‘새것’의 충돌을 다룬 작품이다.

옛것을 대표하는 장르는 연극이고 새것을 대표하는 장르는 영화다. 그러나 단지 연극과 영상의 대결만 펼쳐지는 게 아니다. 전통과 현대, 냉소와 열정, 고상함과 솔직함, 가식과 폭로가 공연 내내 엎치락뒤치락 씨름을 펼친다. 한쪽이 한판승을 거뒀다고 생각되는 순간 다른 쪽이 뒤집기로 다시 판세를 역전시키는 팽팽한 기술씨름이다.

에이미(서은경)는 작고한 유명화가 아버지와 연극배우인 어머니 사이에서 예술가의 안목을 키워온 해맑은 여인. 그가 영화감독을 꿈꾸는 남자친구 도미닉(김영민)을 대동하고 칠순이 넘은 친할머니 이블린(백수련)과 어머니 에스메(윤소정) 단둘이 사는 런던 교외의 대저택을 방문한다. 첫 만남부터 에스메와 도미닉은 삐걱거린다. 모든 것이 허공에 펼쳐지는 영상미학을 찬미하는 도미닉의 예술관과 혼신을 다한 내면연기를 중시하는 에스메의 예술관은 시작부터 아귀가 맞지 않는다. 게다가 에스메가 영국문화의 정수를 누리는 상류층이라면 고아로 자란 도미닉은 그에 반감을 품은 반항아다.

1막이 봄나물을 씹을 때처럼 씁쓸하면서도 상큼한 맛을 풍긴다면 그 후 6년의 세월이 흐른 2막은 단단한 육질이 느껴지는 고기 맛을 선보인다. 최고 인기 TV 문화프로그램 연출자가 된 도미닉은 에이미의 간절한 청을 받아 이제는 한물간 에스메를 토론자의 한 명으로 출연시키려 한다. 그러나 토론회의 주제가 ‘연극의 죽음’임이 밝혀지면서 두 사람의 냉전이 열전으로 폭발한다. 도미닉은 연극이 유효기간이 지났다며 이빨을 드러내고 에스메는 도미닉이 원하는 것은 대중을 등에 업은 권력뿐이며 예술을 혐오한다고 결정타를 가한다.

다시 8년 뒤로 넘어간 3막은 쓰디쓴 커피 맛이다. 도미닉을 그처럼 속물이라고 비난했던 에스메가 추락한다. ‘묻지 마 투자’의 대가로 엄청난 빚더미에 앉은 에스메는 그토록 경멸했던 TV 연속극에 출연하며 껍데기뿐인 품위를 유지하느라 몸부림친다. 그 잘못된 투자의 원흉인 이웃집 속물 사내 프랭크(이호재)가 유일한 탈출구가 된다. 남편 도미닉의 외도로 절망에 빠진 에이미는 그런 엄마의 모습이 견딜 수 없다. 도미닉이 잘못된 선택이라고 비난하던 엄마가 그보다 더 잘못된 선택으로 파멸하는 자가당착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 순간 에이미는 힘겨운 고백을 털어놓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내가 도미닉을 선택했던 건 그 사람이 미래였기 때문이야. 난 엄마가 두려웠어, 엄만 과거니까.”

마지막 4막은 박하사탕 맛이다. 무대는 처음으로 에스메의 저택이 아닌 허름한 분장실로 바뀐다. 연극배우로 재기에 성공한 에스메를 영화감독으로 성공한 도미닉이 찾아온다. 둘의 대화를 통해 도미닉과 이혼한 에이미가 죽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에스메는 여전히 냉랭하지만 도미닉은 화해의 손을 내민다.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 그냥 아무 조건 없이 사랑을 줘야 한다, 그럼 보답 받을 날이 있을 거다”라는 ‘에이미의 생각’에 비로소 동화됐다며. ‘에이미의 생각’은 에이미가 어린시절 펴내던 신문 이름이자 이 연극의 원제다.

도미닉은 “계속 절 미워하시는 건 어머님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에스메는 “내 인생은 여기 극장에 있어. 막이 오르면 내 인생이 펼쳐지지. 내 공연이 내 삶이야”라고 답한다. 그렇게 ‘새것’과 ‘옛것’은 힘겨운 화해에 도달한다.

영화 ‘데미지’와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 등의 각색자이기도 한 극작가 헤어는 이런 문화사적 충돌을 애틋한 가족사에 녹여내면서 영국의 계급갈등과 신자유주의의 폐해까지 포착해냈다. 폐부를 찌르는 그 대사 이면에 숨겨진 감정을 밀도 높게 그려낸 윤소정, 김영민, 서은경 씨의 팽팽한 연기대결도 일품이다. 보이지 않게 극의 흐름을 끌고 간 백수련, 이호재 씨의 명품조연도 빛을 발해 오랜만에 연극의 진수를 느낄 수 있는 무대를 보여줬다. 2만5000원. 21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02-3673-5580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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