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농촌선 쌀-감주 오가 미풍양속서 실리적 측면 변질 ‘받은만큼 부조’ 풍조 비판론도 흉사(凶事), 길사(吉事)에 주고받는 부조(扶助)는 한국사회의 오래된 품앗이 문화다. 현대 한국인들은 돈, 재물을 보내 축하나 애도를 표하는 부조 방식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부조문화가 전통사회에서부터 지금 같은 방식이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 전기까지만 해도 상례 등 흉사에서 많이 이뤄졌던 부조문화는 점차 혼례, 회갑 등 길사로도 확대됐다. 그림은 김홍도(1745∼?)의 ‘모당 홍리상평생도 6곡병(慕堂洪履祥平生圖六曲屛)’ 중에서 ‘혼례식’. 사진 제공 국립중앙박물관한국 부조문화의 변천사를 15세기부터 규명한 논문이 나왔다. 박동철 한국국학진흥원 연구원이 최근 열린 실천민속학회 전국학술대회를 통해 발표한 ‘미풍양속으로서 부조문화의 전통과 변화’다. 박 연구원은 이 논문에서 한국사회의 부조문화가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했는지를 15세기부터 20세기까지 통시적으로 분석했다.
‘조선왕조실록’(태조∼철종), ‘고종실록’, ‘순종실록’, 문사들의 개인 문집 등을 살펴보면 조선시대 전기의 부조는 현대의 양상과 많이 달랐다. 부조는 주로 상례(喪禮) 등 흉사에 한해 이뤄졌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조, 세종 등이 ‘부조를 내리는 관례’에 따라 죽은 신하의 유족에게 부조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 17세기 문신 신흠의 시문집 ‘상촌집(象村集·1630년)’ 기록을 보면 이런 전통이 17세기까지 지속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공은 일찍이 청강공의 초상 때 들어온 부조금 중에서 상사에 쓰고 남은 돈을 증식하여 백형인 정자공의 두 아들을 결혼시켰다.”
조선시대 부조품은 현물보다는 의례에 필요한 물품 위주로 이뤄졌다. 쌀, 콩, 기름 등의 음식이나 관(棺) 등이 권장 부조물품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이 1426년 쓰시마(對馬) 섬 태수의 할머니와 어머니의 상례를 슬피 여겨 조미 100석, 콩 50석, 종이 200권, 백세면주 백세저포 각 10필과 곶감 50첩, 잣 3석, 대추·밤 각 2석을 부조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 사람을 보내 상례를 도와주는 몸 부조도 빈번했다.
하지만 18세기에 접어들면서 현금 부조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현금 부조 사례가 처음 확인된 것은 숙종 때 역관 홍우재가 쓴 통신사 일기 ‘동사록(東사錄·1682년)’에서. 18세기 후반 정약용 역시 상사에 1000전을 부조했다는 사실을 ‘다산시문집’에 기록했다.
이 같은 부조문화가 흉사에 그치지 않고 혼례, 돌잔치 등 길사로 확대되고 금반지, 현금 등이 보편화된 것은 20세기 중후반 들어서면서부터.
경북 청송군 홍미자 씨의 1977년 혼례 부조기를 보면 농촌지역에서는 아직 의례에 필요한 쌀, 감주 등의 물품이 부조품으로 오갔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1980년대 전화송금, 계좌이체 등이 가능해지며 현금 부조가 빠른 속도도 광범위해졌다. 이에 대해 박 연구원은 “미풍양속이나 예절의 일환이었던 부조문화가 실리 행위의 일종으로 변모한 것”으로 해석했다.
박 연구원은 한국 부조문화의 실리적인 측면에 대한 비판도 내놓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자신이 부조 받은 횟수에 맞춰 부조하는 행위. 이미 17세기 초 문신 장현광은 시문집 ‘여헌집(旅軒集)’에서 이 같은 세태를 비판하기도 했다. 박 연구원은 “전통사회 때부터 이어져 온 한국의 미풍양속 부조문화가 최근 체면문화, 과시문화와 결합되며 일종의 ‘세금 고지서’로 여겨질 만큼 의미가 크게 바뀌게 됐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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