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衛靈公(위령공)’의 이 章에서 공자는 군자와 소인의 임무가 다를 수 있다고 논하였다. 해석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주자는 知와 受를 서로 다른 것으로 보아 知는 내가 사람을 관찰하는 것, 受는 저 사람이 나에게서 받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았다. 이에 비해 정약용은 知와 受를 모두 ‘맡아 본다’로 해석했다. 곧, 知를 일에 참여하여 주관한다는 뜻의 ‘與知(여지)’로 본 것이다.
주자의 설에 따른다면 이 장은 “군자는 작은 임무를 가지고는 능력을 알 수 없으나 큰 임무를 받을 수 있고, 소인은 큰 임무를 받을 수는 없으나 작은 임무를 가지고 능력을 알 수 있다”로 풀이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정약용의 설을 따랐다. 可는 ‘∼하게 할 수 있다’, 不可는 ‘∼하게 할 수 없다’이다. 小知는 작은 임무를 맡아봄, 大受는 큰 임무를 받아 행함이다.
‘爲政’편에서 공자는 ‘君子不器’라 하였다. 군자는 그릇처럼 국한되지 않기에 한 가지 재주나 技藝(기예)에 능한 것이 아니다. 군자는 회계 장부를 적어 기일 안에 조정에 보고하는 일이나 백성의 생활필수품인 米鹽(미염)을 관리하는 일에서는 재능을 발휘하지 못할 수 있다. 오히려 군자는 어린 군주를 보호하고 나라의 국정과 운명을 책임지며, 군주를 요임금, 순임금과 같은 성군으로 만들어, 백성들에게 큰 은택을 끼칠 수 있다.
‘회남자’에서는, 살쾡이로 소를 잡게 할 수 없고 범으로 쥐를 잡게 할 수 없다든가, 도끼로 터럭을 자르려 하고 칼로 아름드리 나무둥치를 자를 수 없다든가 하는 비유를 들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군자와 소인을 역할의 차이로 이해하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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