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투병 중인 노(老)시인이 사는 곳은 경기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의 아담한 담홍빛 2층 주택이었다. 최근 그는 문학인생을 마무리하는 듯 시집으로 묶이지 않은 근작 20여 편을 포함해 시 전집을 출간했다. 병세를 안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을 서둘렀다. 전집이라지만 일평생 일곱 권의 시집밖에 내지 않았던 과작의 시인이라 500페이지 분량의 한 권으로 만들어졌다. ‘최하림 시전집’이다.》
■ 김치수 교수 “모더니즘서 출발, 현실로 지평 넓힌 최 시인 작품세계는 우리 세월을 응축”
■ 최하림 시인 “시쓰기 그만두고 강으로 나서니 흐르는 물을 붙잡을 생각 없어져”
“힘 없어도 계속 조금씩 움직이며 다녀야지. 날이 좋아지면.” 시 전집과 신작 비평집을 새해 선물 삼아 주고받은 뒤 김치수
교수(오른쪽)가 최하림 시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최 시인은 이 말을 그대로 받아 다짐하듯 말했다. “그래, 날이 좋아지면.”
양평=원대연 기자
17일 오후 문학평론가 김치수 이화여대 명예교수(70)와 함께 이곳을 찾았다. 정원이 내다보이는 창가에 미동 없이 앉아 있던 시인(71)이 몸을 일으켰다. 거동이 불편한데도 시인은 지팡이를 짚고 기어코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 교수의 손을 맞잡은 그의 표정은 반가움으로 환해졌다. 호수가의 호젓한 전원주택은 가끔씩 그의 서울예대 제자들이 들르는 것 외엔 찾는 이가 많지 않다고 했다. 시인은 “외롭다”고 짧게 말했다.
이들의 인연은 그 자체로 한국 현대문학사의 일면을 대변해 준다. 1960년대에 문학 활동을 시작한 4·19세대 문인들이자 평론가 김현, 소설가 김승옥 씨 등과 함께 한국문단 최초로 ‘한글세대’의 등장을 알렸던 동인지 ‘산문시대’를 펴냈다.
김 교수가 양평을 찾은 것은 지난해 여름 투병 소식을 듣고 방문한 후 몇 개월 만이었다. 때마침 최 시인의 시 전집과 나란히 김 교수의 신작 비평집 ‘상처와 치유’가 같은 출판사에서 나왔다. 최 시인은 힘에 부친 듯 말수가 눈에 띄게 적었지만 동시에 출간된 김 교수의 책을 받아 들면서 “잘됐어, 아주 잘된 일이지”라고 연방 고개를 끄덕였다.
최 시인은 간암 확진을 받은 직후인 지난해 봄부터 전집을 준비해 왔다. “암이란 게 상상력을 앗아가는 것 같아. 시술 받는 것이 너무 힘들고 걸을 수도 없으니 생각이 혼란스럽기 짝이 없고. …힘 닿는다면 열 편 정도 새로 보태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했지.”
최 시인의 나지막한 말에 김 교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음만 잘 먹으면 병마를 이길 힘도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시집도 아주 잘 나왔던데, 서문을 읽으니 착잡해지고 흐뭇해지고 여러 생각이 들었네.”
최 시인은 서문에서 삶의 끝자락을 응시하는 듯 이처럼 담담히 읊조렸다.
“마침내 나는 쓰기를 그만두고 강으로 나갑니다. …죽은 자들과 대면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나는 흐르는 물을 붙잡으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내 시들은 그런 시간을 잡으려고 꿈꾸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그런 몇몇 문장이 떠오른 듯 김 교수가 말끝을 흐리자 시인은 농담으로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어쨌든 다른 건 몰라도 ‘문지’에서 나온 시집들 중 장정은 내 것이 최고야.” 시 전집 표지 이미지로 쓰인 것은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조각이다. 화제는 자연스레 1960년대 ‘산문시대’ 발간에 얽힌 추억들로 이어졌다. 앙상한 뼈만 추려낸 자코메티의 조각을 유난히 좋아했던 최 시인은 그들이 꾸렸던 ‘산문시대’의 표지로 그의 작품을 쓴 적이 있었다. 김 교수는 그들의 오래전 만남을 회상하면서 “김현은 방학이면 목포에 내려가 편지로 소식을 전했다. 하루는 ‘여기 음악, 미술, 문학 뭣 하나 모르는 것이 없는 기막힌 천재 시인을 만났으니 보러 오라’는 소식을 전해왔는데 그게 최하림 씨였다”고 말했다.
동인지 ‘산문시대’가 발행되는 동안 이들은 한 달 동안 하숙집에서 합숙을 하면서 책을 만들었다. 김 교수는 “누가 봐도 비리비리했던 대학생들”이라고 표현했지만 그들은 반세기 뒤 한국 문단의 중심축을 차지하게 됐다.
최 시인은 “돌이켜보면 시 쓰기는 사는 것이었고 전부였다. 우리 시대는 그랬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모더니즘 계열에서 출발했지만 역사현실에 대한 관심을 넓혀갔던 최 시인의 시 세계는 우리가 살아온 세월을 그대로 보여준다” 말했다.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4·19혁명이라는 자유민주주의의 발아를 토대로 한글 문체와 독특한 감수성을 새롭게 발견해 냈다는 자긍심은 아직까지도 이 두 문인을 엮는 단단한 끈이었다.
병세로 긴 대화가 힘들었지만 이들의 대화는 훌쩍 한 시간을 넘겼다. 시인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위에 따로 놓인 책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두꺼운 갱지 봉투에 잘 싸인 그것은 자신의 시전집이었다. 시전집을 선물로 받아 든 김 교수는 한사코 배웅하러 나서려는 그를 만류하며 “추우니 나오지 말게. 몸조리 부디 잘하시게” 하고 손을 굳게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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