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남대총 천마총 등 신라의 대형 고분이 모여 있는 경북 경주의 대릉원. 1974년 이곳 황남대총(5세기)에서 금관과 황금유물 등
2만2000여 점이 출토됐다. 당시 많은 사람의 관심사는 화려한 황금빛 금관이었다. 그러나 금관 못지않게 전문가들을 사로잡은
유물이 있었다. 독특한 입 모양의 담녹색 유리병. 주둥이 부분이 봉황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봉수형(鳳首形) 유리병이라고
부른다. 모양도 날렵하지만 주둥이와 목에 푸른색 띠가 있어 세련미를 더해준다. 멋진 유리병이지만 그 모양은 이국적이었다. 이
유리병이 처음 모습을 드러내자 발굴단은 신라 것이 아님을 직감했다.》
고분 속의 유리 그릇 신라 지배층의 상징물 금보다 귀하게 여겨
구슬 속의 서양 얼굴 외국인 새겨진 유리구슬 지중해-인도 거쳐온 듯
세계 속의 경주로 개방의 힘으로 국력 다져 新스포츠 폴로 즐기기도
○ 신라인들을 매료시킨 지중해 유리
유리는 기원전 4000년경 서아시아에서 처음 제작되었다. 기원전 1세기경 대롱으로 숨을 불어넣어 모양을 만드는 기술이 발명되면서 유리 제작이 활성화되었다. 당시 유리는 로마가 통치했던 동부 지중해 연안을 중심으로 발전해 이 지역에서 만든 유리를 ‘로만 글라스’라고 부른다.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봉수형 유리병은 이집트 시리아 이스라엘 등 동부 지중해 연안에서 만들었던 전형적인 로만 글라스다. 이들 지역엔 지금도 이와 비슷한 모양의 유리병이 전해진다.
4∼6세기의 경주 고분에서는 모두 25점의 유리그릇이 출토됐다. 이들 유리그릇 가운데엔 로만 글라스뿐 아니라 페르시아에서 만든 ‘페르시안 글라스’도 있다. 동부 지중해의 유리가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를 지나 신라 땅으로 들어온 것이다. 1500년 전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에서 동쪽 끝까지, 유리가 대륙을 건너온 이유는 과언 무엇일까.
황남대총 천마총 서봉총 금관총 금령총 등 금관이 발굴된 곳에선 모두 유리그릇이 나왔다. 황금 유물과 함께 출토된 유리그릇. 유리와 황금은 세월이 지나도 변색되지 않는다. 깨지지만 않는다면 영원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유리는 신라인, 특히 지배층을 매료시켰다. 유리그릇은 그렇게 지배층의 상징물이 되었다. 봉수형 유리병의 금실이 이를 극명하게 말해준다. 이 유리병을 보면 훼손된 손잡이를 금실로 감아 보강해 놓았다. 생전에 유리병을 얼마나 귀하게 여겼기에 금실로 유리병 손잡이를 보강했단 말인가. 당시 신라의 지배층은 금이나 보석보다 유리그릇을 더 귀하게 여겼다.
○ 바다를 건너온 로마의 유리구슬
1974년 경주 미추왕릉 C지구 4호분에서 나온 5, 6세기경의 상감유리 목걸이. 마노와 옥 등으로 된 이 목걸이엔 지름 1.8cm의 유리구슬 하나가 꿰어져 있다. 짙은 코발트색 바탕의 이 작은 구슬엔 사람 얼굴 4개와 오리(또는 백조), 꽃나무 등이 상감기법으로 정교하게 장식되어 있다. 유리구슬에 색깔이 다른 유리 조각을 모자이크처럼 박아 넣은 것이다.
이 가운데 모자이크된 얼굴이 범상치가 않다. 하얀 피부에 동그랗고 푸른 눈, 오뚝한 코, 예리한 콧날, 붉은 입술…. 신라인의 고분에서 나온 유물인데 신라인의 얼굴이 아니다. 중앙아시아나 서아시아 또는 유럽인의 얼굴이다. 상감유리구슬의 얼굴은 1세기 전후 로마와 지중해 연안에서 만들었던 유리구슬과 흡사하다. 제작기법도, 얼굴의 모양도 모두 비슷하다. 경주의 고분에서는 반점이나 눈동자 무늬를 장식한 유리구슬도 많이 나왔다. 이것 역시 로마와 지중해는 물론이고 인도와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발견된다. 따라서 이 유리구슬은 로마와 지중해를 출발해 인도와 인도네시아의 바닷길(해상 실크로드)을 거쳐 경주에 상륙한 것으로 보인다.
유라시아 서쪽 끝 지중해 연안에서 유라시아 동쪽 끝 신라의 경주까지 험한 길을 지나온 유리. 그것은 고대의 동서 교류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유물이다. 당시 유리 공예의 최대 산지였던 동부 지중해는 유리를 유라시아 대륙 곳곳으로 수출했다. 서기 5, 6세기 유리는 유라시아 최고의 인기 교역상품 가운데 하나였다. 유리는 새로운 재질과 매력적인 디자인으로 유라시아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이들 유리 제품은 경주에서 다시 바다를 건너 일본의 나라(奈良) 지역까지 넘어갔다.
○ 유리의 길, 유리의 힘
신상품 유리는 신라의 새로운 도약을 상징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함순섭 학예연구관의 설명. “당시 신라는 외래에서 들어온 유리 제품을 왕경에 집중시켰고 여기엔 왕경 경주의 권위를 강화하고자 했던 의도가 감춰져 있었다.” 함 연구관은 이를 위세(威勢)경제라고 불렀다. 신문물을 통해 정치적 의도를 실현하고 권력의 집중화를 이루려 했다는 것이다. 유라시아 서쪽 끝에서 들어온 유리는 이렇게 신라의 정치적 기반이 되었다.
정치적인 의도와 별도로 유리는 신라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유리가 닦은 길을 타고 다양한 외국의 문화가 들어오고 사람도 따라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는 신라문화에 개방성의 초석을 마련해 신라가 삼국 통일을 이루고 경주가 고대 동아시아 최고의 도시로 발전해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국립경주박물관에 가면 경주시 구정동 석실분(石室墳·돌방무덤)의 모서리 기둥(9세기)이 전시되어 있다. 여기엔 방망이를 어깨에 걸쳐 멘 서역인 무인(武人) 한 명이 조각되어 있다. 무덤 침입자를 막아내기 위한 비상용 방망이일 것 같은데 잘 들여다보니 폴로 스틱을 메고 있다. 폴로는 한국식으로 말하면 격구(擊毬 또는 타구·打毬)다. 당시 신라 사람들이 격구를 얼마나 좋아했기에 이렇게까지 조각을 해놓은 것일까.
당시 격구는 유라시아 최고의 인기 스포츠였다.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유행했던 폴로가 실크로드와 중국 당(唐)을 거쳐 통일신라 한반도에 상륙했다. 신장위구르(新疆維吾爾), 중국 장안(長安·지금의 시안), 일본 나라의 곳곳에 격구의 흔적이 남아 있다. 신라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많은 신라인들은 유리의 길을 따라 들어온 이 신종 스포츠에 매료됐다.
고대 경주는 개방적인 도시였다. 유라시아의 동서를 관통했던 유리, 유라시아의 최고 인기상품 유리는 그 개방성의 중요한 상징물이다. 유리는 단지 물질에 그치지 않았다. 유리의 개방성은 신라의 힘이었고 그 힘은 통일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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