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책 갈피마다 향연이 펼쳐진다. 갖가지 소리와 냄새가 피어오른다. 냉이 된장찌개가 보글보글 끓는다. 미네스트로네 수프가 뭉근한 불 위에 천천히 익어간다. 제철 야채와 과일이 가득한 생기 넘치는 샐러드 한 접시. 라즈베리 잼을 듬뿍 얹은 쿠키의 저 앙증맞은 자태! 손끝으로 레시피에 보이지 않는 줄을 긋는다. 신선한 돼지고기 목살을 적당히 잘라 그릇에 담는다. 음, 목살은 너무 두껍지 않은 게 좋겠어. 맛술 1티스푼(T). 후춧가루를 고루 뿌려 잡내를 없앤다. 페퍼밀로 그때그때 통후추를 갈아 쓰는 편이 낫지, 향기가 달라. 양파는 껍질을 벗긴 뒤 두툼하게 채 썰어 둔다. 매콤한 제육볶음에 양파가 빠져선 안 돼, 그럼. 양념은 어떤 것들이 들어가나? 고춧가루 1∼1.5T, 고추장 3T, 다진 마늘 1T. 아, 여기에 매실청과 조청을 더해 은근한 단맛을 내는구나. 꿀꺽. 잘 볶은 뒤 송송 썬 청양고추와 어슷하게 썬 대파를 올려 마무리. 머릿속은 이미 요리재료와 도구, 각종 양념이 모두 갖춰진 완벽한 주방이다. 그러다 궁금해졌다. 셰프들은 어떤 요리책을 곁에 두고 자주 들춰볼까. 다른 사람의 요리책을 보긴 볼까. 셰프와 요리전문가 8명이 각별히 사랑하는 요리책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송경섭 민가다헌 셰프(39)는 “조리 기술도 중요하지만 창의력과 독창성이 경쟁력인 듯하다”면서 영감을 얻은 요리책 세 권을 소개했다. 프랑스 요리사 알랭 뒤카스가 쓴 ‘Grand Livre de Cuisine(훌륭한 요리책)’은 세계적 트렌드에 맞는 유럽식 요리가 수록된 책. 그는 프랑스 보르도의 와이너리에 교육을 받으러 갔다가 이 책을 접했다. 정확하고 구체적인 레시피가 강점이다. ‘Les Meilleurs Ouvriers de France(프랑스 최우수 요리사)’에는 프랑스에서 첫손에 꼽히는 요리사들의 사진과 레시피가 담겼다. 손님으로 식당을 찾은 프랑스 푸드 디자이너가 그에게 선물한 책이다.
황혜성, 한복려, 정길자의 ‘조선왕조 궁중음식’은 그를 한식의 세계로 초대했고 깊이를 맛보게 해줬다. “예전과 달리 좀 더 다양한 식재료를 이용한 한식요리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많은 외국인 손님들이 이를 호평해주셨지만 종종 혹평도 받았죠. 전통 한식도 우리의 깊은 맛은 지키되 좀 더 폭넓은 메뉴 개발이 필요합니다. 고급 한식에 대해 연구하기 위해 우리 음식의 유래와 어원부터 익히고 있습니다.”
최혜숙 휘슬러코리아 수석 셰프(35)의 ‘완소’ 요리책은 ‘타샤의 식탁(Tasha Tudor Cookbook)’이다. 타샤는 정원에서 정성스레 기른 과일로 파이와 샐러드, 소스, 향긋한 차를, 산양의 젖으로는 치즈와 천연 요구르트를 직접 만들었다.
“가장 잘하면서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았지만 그 요리가 업무가 되면서 잃어버리기 쉬운 것들을 되찾아주는 책이랍니다. 찬찬히 읽다 보면 요리의 꿈과 열정, 설렘이 다시 살아나요. 긍정의 힘을 끝없이 불어넣어 주는 듯해요. 요리사라는 직업을 ‘하늘이 내린 선물’이라 생각하게 해준답니다.”
‘김영모과자점’의 김영모 대표(47), 요리연구가 최경숙 씨(49)는 수년 전부터 레시피가 수록된 책보다는 ‘요리 관련 서적’을 탐독하고 있다. 김 대표는 “일본과 프랑스에서 발간하는 제과 전문잡지 외에 요리책은 잘 보지 않는다”면서 “새로운 정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요즘 그가 가까이 두는 책은 ‘본초강목(本草綱目)’. 중국 명나라 때 본초학자 이시진이 엮은 약학서다.
“한국의 제과기술은 세계적인 수준입니다. 제과는 서양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한국화를 해 나가야 할 때가 왔어요. 우리 땅에서 난 재료를 개발하기 위해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것은 우리 제과에 접목시키면 좋겠다’ 하고 무릎을 치지요.”
팥과 수수, 조로 만든 빵은 이렇게 태어났다. 빈대떡에 사용하는 녹두로도 빵을 만들고 샐러드에서나 볼 수 있었던 붉은 비트도 빵 재료로 거듭났다. 책에서 얻은 힘으로 그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일에 도전하고 있다. 그는 버터크림 대신 두부크림을 얹은 케이크를 만들어 보려 한다.
“농산물 시장을 제과 재료 시장만큼 많이 다녔습니다. 단지 눈과 입만 즐거운 음식이 아니라 소박하지만 자연의 재료로 영양 균형을 맞춘 좋은 음식을 만들고 싶어요. 재료 하나가 바뀌면 레시피와 공정에 변화가 생기기 때문에 쉽지 않은 일이지만요.”
격려 - 열정 사라질 때 펼치면 긍정의 힘 솟아 조언 - 늘 갖고 다니며 색다른 재료 쓸 때 도움
최경숙 씨는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환경운동가인 마이클 폴란의 책을 아껴 본다. 그는 “요리를 개발하는 사람으로서 식문화를
둘러싼 흐름에 눈길이 간다”고 말했다. 폴란은 ‘잡식동물의 딜레마(The Omnivore's Dilemma: The
Natural History of Four Meals)’에서 오늘날 식품산업의 구조와 식문화 전반을 치밀하게 추적했고 ‘행복한
밥상(In Defense Of Food)’에서는 영양학과 식품산업이 만든 풍경을 비판했다. 7년 동안 직접 땅을 일군 경험을
적은 ‘세컨 네이처(Second Nature)’에서는 환경과 먹을거리 문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다.
“음식은
문화와 환경에 따라 변하기 때문이죠. 예전에는 6, 8인분 기준이던 레시피가 이제는 2, 4인분이 주를 이뤄요. 예전보다 기온이
상승한 서울과 치악산 밑에서 담근 된장의 맛이 각각 다릅니다. 이 책들은 로컬 푸드와 제철 요리의 중요성을 환기시켜줬어요. 내
요리를 이끌고 나가는 동력입니다.”
두바이 7성급 호텔 ‘부르즈 알 아랍’의 수석 총괄 조리장 출신 셰프 에드워드
권 씨(39)는 1000권이 넘는 요리책을 소장하고 있다. 스스로 ‘요리책을 병적으로 수집한다’고 말할 정도다. 하지만 특별히
아끼는 요리책을 묻자 서슴없이 답했다. ‘The Professional Chef(전문 요리사)’. 세계 3대 요리학교 중 하나로
꼽히는 미국 CIA(Culinary Institute of America)에서 펴낸 백과사전 같은 책이다. 2006년에 나온
8판이 1232쪽 분량.
조리법을 비롯해 레스토랑 비즈니스와 물류 및 인적관리까지 셰프를 위한 ‘모든 것’을 담고
있다. 미국 유명 레스토랑 ‘프렌치 론드리’의 셰프 토머스 켈러도 “진지한 요리사들을 위한 최고의 레퍼런스”라고 격찬했다. 권
씨는 이 책 한 권을 제대로 독파하면 경력 7, 8년차 지식이 쌓인다고 했다.
“18년 전 월급 70만 원 받던
시절에 교보문고에서 이 책을 봤습니다. 10만 원쯤 하는 비싼 책이라 쉬는 날마다 서점에 가서 몇 장씩 읽다가 결국 큰 맘 먹고
샀죠.(웃음) 다채로운 식재료, 요리사로서 알아야 할 필수 지식…. ‘외국에 꼭 나가리라!’ 결심하게 도와준 책입니다.”
그는 ‘요리사의 필독서’로 ‘The Flavor Bible(맛 사전)’과 ‘Culinary Artistry(요리의 기교)’를
꼽았다. 이 책은 세계 어딜 가든 꼭 들고 다니는 책이라고. “‘The Flavor Bible’은 맛의 조합에 대해 다룬 책으로
‘궁합’이 맞는 식재료를 알려줍니다. ‘Culinary Artistry’는 창조성을 자극하는 내용으로 메뉴를 짤 때 큰 도움을
주죠. 책장을 넘기다 불현듯 영감이 떠올라서 평소 쓰지 않는 색다른 재료를 기존 요리에 접목해본 적도 있습니다.”
그는 다음 달 중순 첫 요리책 ‘에디스 카페’를 내놓을 예정이다.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에 낸 레스토랑과 같은 이름이다. 이 책에서
그는 에디스 카페 메뉴의 레시피를 모두 공개한다. ‘비법’을 공개하겠다고 했을 때 여러 사람들이 말렸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다.
“요리책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고 싶은 마음이 첫 번째고요, 두 번째는 고급요리를 집에서 만들어봄으로써 음식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높이고 싶기 때문입니다. 음식을 예술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셰프의 고민도 나누고 싶었죠.”
‘반얀트리클럽앤스파서울’의 총 주방장 쉘 콜린 씨는 ‘Larousse Gastronomique(요리 대사전)’를 꼽았다.
1938년에 처음 출간된 책으로 조리용어, 레시피, 식당에 얽힌 역사, 역사 속 요리사 등 요리에 대한 지식과 풍부한 사진을
수록했다. 미국 뉴욕 맨해튼의 요리학교 ICE(Institute of Culinary Education)는 해마다 졸업생에게 이
책을 선물한다.
이탈리안 와인하우스 ‘베라짜노’의 장영선 셰프는 ‘On Food and Cooking(음식과
요리)’을 틈틈이 읽는다. 식품학자 해럴드 맥기가 쓴 책으로 ‘요리과학의 바이블’로 꼽힌다. 그는 “요리 안에 존재하는 내가
모르는 원리를 알고 이해하는 즐거움을 준다”고 말했다.
요리 분야 파워블로거 문성실 씨(35)는 1997년
신혼시절에 구입한 ‘며느리와 함께 만드는 요리책’을 소개했다. “결혼 직후에 요리책 많이 사잖아요. 그때 서점에서 여러 가지
책을 비교해본 뒤 고민 끝에 손에 넣은 책이죠. 국 찌개 전골 반찬 손님상 등 카테고리별로 400가지쯤 되는 요리를
수록해놨어요. 결혼하고 10년 간 이 책만 봤답니다. 입맛에 잘 안 맞는 것도 있었지만 이 책 보면서 음식 참 많이 해먹었네요.”
‘아침 점심 저녁’ ‘냉장고 요리’ 등 여러 요리책을 쓰면서 문 씨는 늘 이 책의 존재를 떠올렸다. “‘알짜’ 요리만
선별하기보단 레시피를 좀 더 많이 담아야겠다고 마음먹었죠. 저마다 입맛도 제각각이고 선호하는 재료도 다르기 때문에 200가지
이상의 요리를 수록하려고 노력했어요. 손님상처럼 ‘요리가 푸짐하게 많아야지’ 하고요.(웃음)”
글=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디자인=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 ‘참살이와 카페’ 요리책 키워드 ▼
올해 요리책 분야의 키워드는 ‘건강’과 ‘카페’다. 건강한 삶, 참살이(웰빙) 식단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은 메인요리를 넘어 베이킹 분야까지 파고들었다. 베이킹에서 필수 요소로 여겼던 다량의 설탕과 버터 대신 몸에 좋은 재료를 이용해 쿠키와 빵 만드는 법을 소개한 ‘채식 베이킹’ ‘김영모의 건강빵’은 출간 직후 요리 분야 베스트셀러로 올라섰다.
‘I Love Coffee and Cafe’ ‘카페 푸드 스쿨’은 제대로 커피를 즐기는 방법부터 카페 창업을 준비하는 이들을 위한 정보를 담았다. ‘파란달의 카페 브런치’는 ‘가정에서 즐기는 카페 브런치’라는 콘셉트를 내세웠다. 잔치국수, 태국풍 옐로 새우커리, 단호박 크림수프 등을 다뤘다.
지난해에는 ‘집밥’을 내세운 가정식 관련 요리책이 강세를 보였다. 요리 블로거 ‘나물이’로 잘 알려진 김용환 씨의 ‘나물이네 밥상’ ‘땡큐∼ 나물이네 매일밥상’, 블로거 ‘베비로즈’의 ‘2000원으로 밥상 차리기’가 베스트셀러 10위 안에 들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