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속에서도 싹을 내는 곰취/앉은 부채라고도 부른다/겨울잠에서 갓 깬 곰이/어질어질 허기져 뜯어먹고/첫 기운 차린다는/내 고향 태백산맥 응달의 고취 여린 잎/동상 걸려 얼음 박인 뿌리에/솜이불처럼 덮이는 눈/그래서 곰취는 싹을 낸다./먹거리 없는 그때 뜯어먹으라고/어서 뜯어먹으라고 힘내라고/파릇파릇 겨울 싹을 낸다/눈 오는 겨울밤 나도 한 포기 곰취이고 싶다/누군가에게 죄 뜯어 먹혀 힘을 내줄 풀.’ <윤후명의 ‘곰취의 사랑’에서>
마른 나물은 ‘채소 미라’이다. 그 미라가 사람을 살린다. 겨우내 풋것 먹고 싶은 인간들에게 기꺼이 몸을 내준다. 비타민과 섬유질을 보충해 준다. 마른 나물엔 뜨거운 여름이 들어있다. 풋풋한 봄 냄새도 배어 있다. 서늘하고 그윽한 가을이 우러나온다.
마른 나물은 뒤란 처마 밑에서 얼었다 녹았다, 녹았다 얼었다를 거듭하며 살과 뼈를 눅인다. 바람에 온 몸을 내맡겨 물기를 뺀다. 찬이슬 맞으며 자신을 잊는다. 그리고 마침내 시래기가 된다. ‘곰삭은 흙벽에 매달려/찬바람에 물기 죄다 지우고/배배 말라 가면서/그저, 한 겨울 따뜻한 죽 한 그릇 될 수 있다면….’ <윤종호의 ‘시래기’에서>
정월대보름은 마른 나물 먹는 날이다. 묵은 나물 ‘몽땅 떨이’하는 날이다. 지난 가을 갈무리해뒀던 마른 나물을 싹쓸이해버리는 것이다. 보통 오곡밥 아홉 그릇에 9가지 나물을 먹는다. 밥과 나물을 많이 먹으려면 그만큼 힘을 써야 한다. 나무 아홉 짐을 해서 에너지를 쏟는 이유다. 12가지 나물이 밥상에 오르는 집도 있다. 시래기, 박고지, 호박고지, 고비, 고사리, 고구마줄기, 토란대, 깻잎, 다래순, 버섯, 톳나물, 취나물, 가지나물, 콩나물, 도라지나물, 무나물, 죽순나물, 숙주나물….
입춘우수 지나 새봄이 턱밑까지 와 있다. 논두렁 밭두렁엔 냉이 달래가 우우우 올라온다. 시장엔 이미 남해 섬에서 난 해쑥이 보인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도다리를 넣고 된장 풀어 끓이면 그대로 ‘도다리쑥국’이다. 노란 꽃다지나 자주 꽃 광대나물도 얼굴 내민 지 오래다. 두릅이나 참나물은 말할 것도 없다. 연두 새싹엔 봄 냄새가 가득하다. “우두둑!” 뭇 생명의 손가락뼈마디 푸는 소리가 왁자하다. 풋것이 지천인데 굳이 말린 나물을 먹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정월대보름은 한 해 농사를 시작하는 날이다. 이때부터 슬슬 농기구도 손질하고, 거름도 내야 한다. 외양간 황소도 힘을 쓸 때가 왔다. 보름날 아침 외양간 황소나 암소는 사람과 똑같이 나물과 오곡밥을 대접받는다. 이른바 ‘소밥주기’이다. 한 해 동안 소가 아무 탈 없이 일을 잘해달라는 뜻이다. 효성이 극진한 까마귀 대접도 지극하다. 담장 위에 찰밥과 나물을 놓아둬 먹게 한다. 까마귀는 새끼가 부모에게 먹이를 먹여주는 ‘반포지효(反哺之孝)’로 유명하다.
정월대보름날 개는 찬밥이다. 개에게는 먹을 것을 주지 않는다. 하루 종일 굶겼다가 보름달이 뜨면 비로소 먹을 것을 준다. ‘개보름쇠기’ 풍습이다. 이날 개에게 밥을 주면 개가 살이 안 오르고 마른다고 믿는다. 게다가 그해 여름 집 안에 파리가 꼬여 가족 중 병이 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개들은 달을 보고 짖는지도 모른다. 맨 처음 짖는 개는 뭘 보고 짖겠지만 나중에 짖는 개들은 영문도 모른 체 덩달아 따라 짖는다.
마른 나물은 쪼물쪼물 어머니 손맛이 으뜸이다. 양념이 고루고루 잘 스며들어야 맛있다. 말린 시래기는 끓는 물에 삶아 하룻밤 불려 겉껍질을 벗긴 뒤, 서너 번 찬물에 씻어 조리한다. 도라지는 가늘게 쪼개 20여 분 담갔다가 손으로 주물러서 쓴맛을 없앤 뒤 양념한다. 마른 고사리는 찬물에 1시간 정도 불린 뒤 끓인다. 마른 나물은 물기를 손으로 꽉 짜서 없애는 게 중요하다.
정월대보름날 오곡밥과 나물은 자기 집 것만 먹으면 탈난다. 다른 성씨(姓氏) 집 밥을 최소한 3곳 넘게 먹어야 운이 확 트인다. 너도나도 여러 집을 돌아다니며 밥을 빌어다가 먹는다. 백밥집(百家飯 ·백가반) 풍습이다.
쟁반 같은 달이 동산에 두둥실 떠오른다. 너도나도 까치발로 눈부신 둥근달을 맞는다. 꽹과리 징 북 장구의 농악소리가 혼을 뺀다. 달빛이 붉으면 가뭄으로 흉년이 될 조짐이다. 눈부시게 하얀 달이라야 비가 많이 내려 풍년이 온다.
저 멀리 빈들엔 들불이 타오른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언젠가 한 줌의 재가 된다. 검게 타버린 재에서 다시 싹이 돋는다. ‘나도/언제쯤이면/다 풀어져/흔적도 없이 흐르고 흐르다가/그대 상처 깊은 그곳까지/온 몸으로 스밀/죽, 한 사발 되랴.’ <박규리의 ‘죽 한 사발’에서>
제주시 애월읍 새별오름은 아예 통째로 타오른다. 그 넓이가 자그마치 41만6036m²(12만6000여 평)나 된다. 오름은 새끼화산을 말한다. 마침 ‘애월(涯月)’은 포구가 안쪽으로 휘어져 들어오는 반달모양이라서 붙은 이름이다. 반달포구에 두둥실 떠오른 보름달, 빨갛게 숯불처럼 타오르는 둥근 오름. 애월 앞 바닷속에도 둥근 달 장아찌가 박혀 있다.
정월대보름날은 묵은 나물과 새봄나물의 교차점이다. 호박고지나물과 냉이 달래나물의 임무교대이다. 참나물과 해쑥이 오고, 시래기와 고사리가 사라진다. 곰삭은 맛이 가고, 상큼하고 풋풋한 맛이 온다. 황태세상에서 생태세상으로 바뀐 것이다. 모든 경계에선 꽃이 우르르 피어난다. 정월대보름날은 천지개벽의 날이다. 대혁명의 날이다.
‘이번 생이 다할 때까지/얼마나 더/내 몸을 비워야 할까,/내 고향은 늘 푸른 동해/그리워 마지못해/내설악 얼음물에도/다시 몸을 담근다./그리워 마지못해/내설악 칼바람에도/다시 내 몸을 늘인다./이번 생을 마칠 때까지/얼마나 더/내 몸을 비워야 할까,’ <박기동의 ‘황태’에서>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