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안동에 핀 ‘러시아 벚꽃’ 향기는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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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3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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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왕벚나무동산’
대본 ★★★☆ 연기 ★★★☆ 무대 ★★★★☆

안톤 체호프의 연극 ‘벚꽃동산’을 한국적 배경과 정서로 녹여낸 사다리움직임연구소의 ‘왕벚나무동산’. 12개의 긴 의자를 통해
등장인물의 물리적 공간과 심리적 공간을 함께 담아낸 무대연출은 11개의 등받이 의자를 활용해 같은 효과를 끌어낸 같은 극단의
‘보이첵’을 연상시킨다. 사진 제공 코르코르디움
안톤 체호프의 연극 ‘벚꽃동산’을 한국적 배경과 정서로 녹여낸 사다리움직임연구소의 ‘왕벚나무동산’. 12개의 긴 의자를 통해 등장인물의 물리적 공간과 심리적 공간을 함께 담아낸 무대연출은 11개의 등받이 의자를 활용해 같은 효과를 끌어낸 같은 극단의 ‘보이첵’을 연상시킨다. 사진 제공 코르코르디움
‘극장의 우상’이란 말이 있다. 17세기 영국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이 말한 4대 우상론의 하나다. 자신의 독자적 판단을 생략하고 전통이나 권위의 베일을 쓴 편견을 우상시하는 것을 뜻한다. 글을 쓸 때 유명한 아무개가 어떻게 말했다는 것을 앞세우면서 그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폐해를 꼬집은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극장에 비유했을까. 베이컨이 살던 시대는 영화를 발명하기 전이므로 여기서 극장은 당연히 연극공연장을 뜻한다. 베이컨의 4대 우상론이 실린 ‘신기관(新機關)’에 따르면 극장에서 상연되는 연극은 사실이 아님에도 진짜보다 더 진짜 같고, 더 우아하고, 더 신나기 때문이란 것이다.

이러한 어원과 관계없이 전통과 권위를 우상시하는 ‘극장의 우상’이 정작 연극현장에서는 어떤 식으로 출현할까. 고전작품을 무대화하면서 전통적 분석과 권위적 해석에만 안주할 때 발생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사다리움직임연구소의 ‘왕벚나무동산’(임도완 이수연 연출)은 ‘극장의 우상’에서 과감히 벗어난 연극이다. 우선 19세기 말 제정러시아를 무대로 한 러시아 극작가 안톤 체호프의 ‘벚꽃동산’을 일제강점하에서 갓 해방된 경북 안동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로 번안했다.

공연 내내 낯선 러시아어 대신 ‘문디이’(친한 사이끼리 상대를 부르는 호칭) ‘천지삐까리’(많다) ‘남구’(나무) 등 질펀한 경상도 사투리의 향연이 펼쳐진다. 러시아 서커스를 오광대놀이로, 러시아 농노해방을 갑오경장으로, 프랑스어는 일본어로 독일어는 중국어로, 케르치산(産) 청어를 간고등어로, 그리고 톨스토이의 ‘죄 많은 여인’을 윤동주의 ‘자화상’으로 바꿔친 재치가 볼 만하다. 윤심덕의 ‘사의 찬미’와 그 곡이 멜로디를 빌려온 왈츠곡 ‘다뉴브강의 잔물결’을 절묘하게 병치해 한국적 서구화를 포착한 감각도 세련되다.

체호프의 고전 과감히 해석
미학적 창의성 돋보이지만
‘노스탤지어’ 형상화 실패
원작의 묘미 제대로 못살려


이런 외형을 능가하는 것은 “내 작품은 본질적으로 코미디”라고 말한 체호프 자신의 해석을 능동적으로 끌어낸 무대연출과 연기에 있다. 연극은 과거에 사로잡힌 채 현실을 직시 못하는 지주 권윤애(김미령) 권재복(이상일) 남매나 그 집안의 종이었지만 신흥부자가 돼 동산을 차지하는 천용구(권재원), 그리고 과거를 상징하는 권씨 남매와 현재를 대표하는 천용구를 비판하며 미래를 꿈꾸는 만년대학생 방혁완(천재홍)을 희화화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말을 쏟아낼 뿐 남의 말에 귀 기울이는 법 없는 에고이스트이자 말과 행동, 겉과 속이 어긋나는 광대들이다.

이들의 광대놀음을 극대화하는 것이 12개의 긴 의자다. 때로는 기차역 대합실, 때로는 대저택, 때로는 그 정원, 그리고 잔치가 열리는 거실 바깥문으로 변신을 거듭하는 이 의자는 이들의 이율배반적인 심리적 공간을 형상화해낸다. 이 작품의 가장 창의적 요소다.

이런 미학적 창의성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노스탤지어의 알갱이를 형상화하는 데는 실패했다. 원작의 벚꽃동산은 이 국가적 파탄에 이른 제정러시아의 서글픈 현실을 대변하는 동시에 ‘어머니 러시아’로 표현되는 본향을 상징한다. 번안극에서 왕벚나무동산은 그 본향적 매력을 상실한 텅 빈 공간에 머물고 만다. 번안극의 주인공인 권윤애 역시 모성애와 방탕함이 뒤섞인 러시아적 여성상으로서 라네프스카야의 미묘한 매력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일본 도쿄에서 정부(情夫)와 딴 살림을 차릴 정도로 모던한 여성이 유교적 전통의 고향에서는 구식여성으로 몰락한다는 설정은 아무래도 설득력이 부족하다. 차라리 작품의 시공간을 국권상실에 처한 20세기 초나 급속한 산업화 속에서 전통을 상실해가는 20세기 후반의 안동으로 잡고, 권윤애 여사를 종갓집 종부로 설정하는 진일보한 파격이 못내 아쉽다.

2만∼2만5000원. 14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02-889-3562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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