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는 부처를 찾아 한없이 채우려고만 했죠. 이제는 그저 비우려고 합니다. 덜어내고 덜어내다 보면 마음은 허공이 됩니다. 번뇌와 망상이 걷힌 곳에 부처가 있더군요.” 충북 충주시 석종사 혜국 스님은 머리 깎고 절밥을 먹은 지 올해로 50년째다. 전국선원수좌회 대표를 지낸 혜국 스님은 성철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목숨을 건 수행을 했다. 오른손 손가락 세 마디를 불사르고, 목을 밧줄에 묶어 대들보에 걸어두고 수행했다. 지금까지 약 80안거를 한 혜국 스님은 이번 동안거(冬安居) 동안 ‘공(空)’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비우는 걸 알게 됐지만 아직도 수행은 고행입니다. 하지만 마음의 고요만 즐기면 안 됩니다. 이 마음, 중생을 위해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해야죠.”
지난달 28일 전국 산사(山寺)의 산문(山門)이 활짝 열렸다. 화두 하나 붙들고 지난해 음력 10월 보름부터 선방(禪房)에 앉았던 97개 선원 2244명의 수행자가 대중 속으로 향했다. 동안거 동안 스님들은 새벽 2, 3시에 일어나 세 끼 공양과 잠깐의 포행(布行·참선의 피로를 풀기 위해 느리게 걷는 것) 시간을 제외하고 오후 9시까지 선방에서 정진한다. 해마다 있는 동안거지만 올해는 어떤 특별한 사연과 깨달음을 가지고 산문을 나섰는지 스님들에게 전화로 물어봤다.
전북 남원시 실상사 선덕(禪德·선리에 밝아 덕망이 높은 스님) 도법 스님은 올겨울을 선방 대신 길에서 보냈다. 이른바 ‘움직이는 선원’. 스님은 지리산 주변 사찰의 스님들과 함께 하루 평균 20여 km씩, 지리산 둘레 800리 길을 돌며 화두를 참구하고 불교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토론하는 실험을 했다.
음력 10월 보름부터 다음 해 정월 보름까지 이어지는 ‘동안거’ 기간에 스님들은 선방에서 자신과의 싸움에 매달린다. 경기 의정부시 망월사에서 한 스님이 좌선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도법 스님은 “온몸으로 움직이며 정진하니 몸과 마음이 활기찼다”며 “잡념 없는 움직이는 동안거를 했다”고 말했다.
“간화선(看話禪·화두를 가지고 참선하는 것)에 대해 우리 불교계는 편견을 가지고 있어요. 좌선(坐禪)만이 능사는 아니죠. 앉기와 걷기를 병행하면 참선의 효과가 배가됩니다. 논밭에서 일하면서도, 염불을 하면서도 간화선 수행이 가능합니다.”
법랍 33년째로 대표적인 학승 중 한 명인 대구 동화사 불교대 학장 해월 스님은 “이번 동안거 동안 내면을 관조하는 힘, 즉 선정(禪定)이 생겼다”며 “전에는 잡념으로 10분도 집중하기 어려웠지만 이제는 1시간 이상 무념(無念)으로 참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일본 도호(同朋)대에서 공부하고 인도에서도 수행한 해월 스님은 “전국 선원 수백 곳에서 수천 명이 동시에 수행하는 안거 전통은 우리나라만의 소중한 정신 자산”이라며 “이런 전통이 무너지면 한국 불교는 ‘박물관 불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젊은 스님에게 안거는 어떤 의미였을까. 법랍 4년인 전남 해남군 대흥사 무인 스님은 “아직 답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실망하지 않고 다음 안거에 도전하겠다”고 패기 있게 말했다. 무인 스님은 “처음 안거에 들어갈 때는 고되지만 이 삶이나 저 삶이나 똑같다는 생각으로 새벽바람을 이겨냈다”고 말했다.
사판(事判·행정을 맡은 스님)으로 살다 선방의 새벽 공기를 다시 접한 스님에게 동안거는 출가 때의 초심을 찾는 계기였다. 한국불교문화사업단장으로 조계종단의 템플스테이를 이끌었던 진경 스님은 3년 만에 본사인 전남 순천시 송광사로 돌아가 선방에서 겨울을 났다. 진경 스님은 “새벽 2시부터 예불, 참선하려니 힘들었지만 수행자의 본분이 무엇인지 다시 깨달았다”며 “불심은 역시 고행에서 싹튼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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