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고기 안 먹기보다 빵-과자 참기 더 힘들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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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3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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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전채식’으로 일주일 살아보니

예전엔 몰랐다. ‘채식주의자(vegetarian)’의 어원이 채소(vegetable)가 아니라 ‘온전한, 완전한, 건강한’이란 뜻을 가진 라틴어 ‘베게투스(vegetus)’라는 것을…. 채식이란 용어 속에 이미 온전하고 자연적이며 건강한 식사법이란 의미가 담겨 있는 셈이다. 채식주의자가 늘고 있다. 건강상의 이유부터 환경 파괴 예방이나 동물의 권리 보호 등 채식을 하는 이유도 다양해졌다. 쇠고기 등 식용으로 가축을 대량사육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 양이 공장에서 배출되는 양보다 많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기자도 일주일 동안 채식주의자로 살아보기로 했다. 바지 허리치수를 늘려야 할 정도로 자꾸 묵직해지는 뱃살과 삼겹살이나 보쌈을 먹을 때도 채소는 입에 대지 않고 고기만 먹을 정도로 육식을 즐기는 식습관에 제동을 걸고 싶었다.

○ 우유, 달걀도 안먹는 ‘비건’에 도전

세계채식연맹(IVU)은 ‘채식주의자’를 ‘육지동물은 물론이고 물고기도 먹지 않는 사람으로, 우유나 계란은 기호에 따라 먹을 수도, 안 먹을 수도 있다”고 정의한다. 채식주의자는 △육고기, 물고기는 물론이고 우유, 계란 등 동물성 음식은 일절 섭취 않는 완전채식인(비건·Vegan) △우유 치즈 등 유제품은 먹는 우유채식인(락토·Lacto) △유제품과 계란까지 먹는 우유·계란채식인(락토오보·Lacto-Ovo) △육고기만 피하는 생선채식인(페스코·Pesco) 등으로 분류한다.

기자는 완전채식인인 비건을 체험하기로 했다. ‘기껏 일주일인데 힘들면 얼마나 힘들겠어’ 하는 자만심이 도전을 부추겼다. 하지만 체험 첫날부터 톡톡히 신고식을 치렀다. 평소처럼 아침에 일어나 우유를 마시다가 “우유도 안 먹기로 한 것 아니냐”는 아내의 지적을 받았다.

선배 기자와 함께 나간 취재원과의 점심식사 자리도 고역이긴 마찬가지다. 이날 점심 장소는 타이 레스토랑. 메뉴에서 고기가 안 든 음식을 찾기란 어려웠다. 고기가 안 들었다며 종업원이 추천한 볶음밥에는 계란과 게살이 잔뜩이었다. 밥 위에 놓인 계란 프라이를 “오늘부터 채식주의 한다고 했지?”라며 자기 접시로 옮기는 선배의 모습은 공복감을 2배로 급상승시킨다.

이날 퇴근까지 먹은 음식이라고는 두유 한 잔이 전부. 퇴근과 동시에 냉장고를 열어보지만 비건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은 거의 없다. 냉동만두부터 인스턴트스파게티, 먹다 남은 피자까지 고기나 해산물, 우유나 계란이 든 음식투성이다. 오렌지 하나를 걸신들린 듯 까먹은 뒤 밥, 김치, 깻잎장아찌, 김이 전부인 소박한 저녁을 먹고 잠을 청한다. ‘김치에 든 젓갈은?’하는 생각은 생존을 위해 잠시 접었다. ‘과연 일주일을 버틸 수 있을까?’ TV 속 미국 드라마에선 바비큐 파티가 한창이다. ‘꼴깍’ 침이 넘어간다.

굽고 지지는 회식자리선 ‘난감’
짧고 편해진 화장실 시간 ‘흐뭇’





○ 아랫배 가뿐하게 만드는 채식의 힘

체험 이틀째. 아침은 시리얼에 우유 대신 두유를 넣은 것으로 해결했다. 점심미팅은 취재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회사 근처 샐러드바로 장소를 정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비건에게는 샐러드바도 만족할 만한 해법은 아니다. 샐러드에는 야채나 과일 말고도 닭가슴살, 연어, 오징어 등 각종 육류나 해산물이 잔뜩 들어 있었다. 식후 커피전문점에서 평소 즐겨마시는 카푸치노를 시키려다 우유 거품이 들어간다는 생각에 급히 홍차로 주문을 바꿨다. 저녁식사는 퇴근길 죽 전문점에서 ‘순두부브로콜리죽’으로 해결했다. 수프에 고기성분이 들어있다는 말에 이틀째 라면을 끊었더니 아랫배의 더부룩함이 한결 덜하다는 것이 위로가 된다.

체험 사흘째. 집으로 배달된 녹즙과 전날 먹다 남긴 죽, 사과 반 개로 아침을 대신했다. 점심은 산사음식 전문점인 ‘산촌’(서울 종로구 인사동)으로 예약했다. 산촌의 점심메뉴는 1인당 2만2000원. 점심 한 끼 가격으로는 확실히 부담스럽지만 고기 대신 버섯, 우엉 등을 쓴 잡채나 더덕무침 같은 반찬 덕분에 오랜만에 제대로 식사를 했다.

채식주의 입문자에게 전국의 채식식당 정보를 수시로 업데이트하는 한국채식연합의 인터넷 홈페이지(www.vege.or.kr)는 매우 유용하다. 채식용품 취급 업체 목록과 두부과자, 양파빵 같은 채식요리 조리법, 우유나 계란이 없이 빵을 만들고 버섯이나 콩가루 등으로 육수를 대신할 채수(菜水)를 만드는 방법도 적혀있다.

오후에는 인터넷으로 남은 5일간 채식주의자로 일용할 양식을 주문했다. 아침대용인 떠먹는 두부에 콩으로 만든 소시지, 각종 새싹채소를 함께 주문한다. 회사에서 야근을 한 이 날, 평소와 달리 선배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지 못하고 건너뛴다. 늦은 시간 회사 근처에 채식을 할만한 마땅한 식당도 없고 채식을 한다고 유난을 떨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 덕분에 채식주의자들이 호소하는 회식자리의 고통이 어렴풋하게나마 공감이 된다. 대다수 채식주의자들은 회식자리에서 공기밥과 콩나물, 시금치 같은 밑반찬 정도로 끼니를 해결한다. 고기를 굽고 지지는 자리가 많은 한국의 회식문화에서 채식주의자는 자칫 밥 한 끼 함께 먹기 힘든 별난 인간으로 비치기 십상이다.

○ 처음 맛본 콩고기, “진짜 콩고기 맞아요?”


나흘째. 점심식사를 하러 채식·약선요리 전문점 ‘위푸드케어스(서울 신사동)’를 찾았다. 난생 처음으로 맛보는 콩불고기의 맛에 감탄한다. 씹을 때 쫀득함이 조금 덜한 것 외에는 실제 고기와 큰 차이가 안 느껴진다. 식당 주인에게 “정말로 콩고기 맞느냐”고 물었을 정도다. 이날 저녁 지인과의 술자리에선 와인 안주로 나온 치즈에는 손도 안 대고 과일·야채 샐러드만을 식사 겸 안주로 먹었다. 포만감은 떨어지지만 다음날 아침 화장실에서 고생하는 시간도 짧아지고 늦은 시간까지 술을 적잖이 마셨음에도 숙취가 한결 덜하다. 채식주의 체험을 위해 평소보다 술 약속을 줄인 영향도 있겠지만 긍정적인 신호임에 분명하다.

닷새째, 집에 배달돼 온 콩소시지를 볶아 오리엔탈 소스로 심심하게 간을 한 새싹 채소에 버무려 저녁 반찬을 했다. 김치찌개에는 햄 대신 콩소시지를 썰어 넣었다. 햄이나 참치를 넣었을 때 찌개 위에 떠다니던 기름덩이가 줄었다. 동물성 지방이 없는 콩소시지는 씹을 때 다소 퍽퍽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식당에서 콩 소시지 요리를 내놔도 콩으로 만들었다고 의심하지 않을 것 같다.

○ 채식 입문은 페스코나 락토오보로

채식 체험 엿새째인 토요일, 떠먹는 두부, 녹차성분이 든 두유와 검은콩 두유를 섞은 시리얼로 아침을 먹는다. 채식으로 하는 아침이 익숙해지면서 마치 한 달은 채식주의자로 산 것 같은 기분이다. 간식으로 국내 유기농 식품 업체인 ‘올가’에서 수입한 유제품이 들어있지 않은 ‘Non-dairy’ 스티커가 붙은 냉동 파이를 레인지에 데워 먹었다. 우유나 버터가 들어 있지 않아 감칠맛은 떨어지지만 먹을 만 하다. 저녁 식사는 야채 성분만으로 스프를 만들었다는 채식주의 라면을 끓여 먹는다. 스프에 고기 성분이 없는데도 기존 라면과 맛의 차이가 거의 없다. 채식주의자가 아니어도 기존 라면의 느끼한 맛을 싫어하는 사람도 좋아할 만 하다. 생존투쟁 수준이었던 채식으로 끼니 잇기가 일주일 만에 맛을 음미하는 경지에 오르니 신기하기까지 하다.

채식 체험 마지막 날인 일요일. 체험 전에 비해 체중은 2kg 가량 줄었다. 기분 탓도 크겠지만 아침에 일어날 때 몸도 가벼워지고 바지를 입을 때 허리품도 한결 여유 있게 느껴진다. 이날 가족과 함께 저녁 식사로 게요리를 먹으면서 비건 다짐은 깨졌지만 육고기는 일주일 째 한 점도 입에 대지 않았다. 고기보다는 빵이나 과자 금단증세가 강하지만 꾹 참아본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서점에서 우유나 버터 없이 빵을 만드는 방법을 소개한 ‘버터, 계란 없이 만든 채식베이킹(청출판)’과 ‘김영모의 건강빵(동아일보사)’을 구입했다. 어느새 몸이 채식에 적응한 것일까? 채식체험이 끝나는 것이 살짝 아쉽기도 하다. 평생을 비건으로 살 수는 없겠지만 건강을 위해 페스코나 락토오보는 기간을 정해 다시 한번 시도해도 좋을 것 같다.




글=우정렬 기자 passion@donga.com
디자인=김원중 기자 paranwon@donga.com

▼콩고기 채소라면 볶은콩… 건강 돕는 친구들▼

일주일 동안 채식주의로 살아야 한다는 기자의 얘기에 대한 지인들의 반응 중 가장 흔한것은 “빵이나 면 먹으면 되겠네”였다. 하지만 이는 모르시는 말씀. 고기와 해산물은 물론 우유, 버터 등 유제품과 달걀도 먹지 않는 완전채식주의자(비건)에게 시중에서 파는 빵, 과자, 면류의 절대 다수는 ‘그림의 떡’과 같다.

반죽에 버터나 달걀, 유유가 들어있지 않은 빵이나 과자는 거의 없다. 케이크나 쿠키류도 버터와 우유, 계란 덩어리와 다름없다. 유지방이 필수인 아이스크림은 말할 것도 없었다.

라면 역시 수프에 육류나 해산물 성분을 넣지 않는 제품은 거의 없었다. 냉면이나 국수는 면을 메밀이나 밀로 만들었다고 해도 어떤 식으로든 국물에는 고기 성분이 들어간다.

역설적이게도 일주일간 비건으로 살면서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점은 고기를 먹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빵과 과자, 특히 면을 마음껏 먹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페스코나 락토오보 정도면 충분할 것을 괜히 비건에 도전하는 바람에…’라고 후회한 것도 바로 면 때문이었다.

고기보다 강력한 금단증세를 경험케 했던 면은 지난해 농심에서 출시한 채식주의자를 위한 라면인 ‘채식주의 순’으로 해결했다. 육류 없이 100% 채소 성분으로만 수프 맛을 내서 한국이슬람중앙회로부터 이슬람율법에 저촉되지 않게 제조됐음을 뜻하는 ‘할랄’ 인증을 받는 것을 추진하는 제품이다.

간식타임에 느끼는 공복감은 매일 아침 깨끗이 씻은 사과를 잘라 쿠킹호일에 싸서 출근하는 것으로 해결했다. 2년째 채식주의자로 살고 있는 회사원 전혜빈 씨(25·여)는 “땅콩이나 볶은 콩 등 집에서 싸온 견과류를 간식삼아 심심한 입을 달랜다”고 말했다. 과자는 우유나 달걀 성분이 없는 쌀과자, 유기농 매장에서 판매하는 사과나 고구마를 말린 칩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우정렬 기자 passi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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