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연호 시인(41·사진)은 문단의 대표적인 ‘멀티플레이어’ 중 한 명이다. 작곡, 연주, 녹음까지 도맡아 해내는 뮤지션인 그는 문학 행사에서 기타나 시타르(인도 전통 현악기) 연주를 선보이기도 한다. 인터넷문학방송 ‘문장의 소리’ PD로도 활동 중이다.
10여 년간의 공무원 생활도 그의 독특한 이력에 포함된다. 어깨 아래까지 기른 머리를 질끈 묶고 인도 악기 시타르를 연주하는 보헤미안적인 시인이 부천시청 공무원이란 직책을 가졌다니, 쉽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조합’은 아니다. 퇴근 후에야 창작활동이 가능했던 그는 등단한 지 10년이 다 된 2004년에야 뒤늦게 첫 시집 ‘죽음에 이르는 계절’을 펴냈다. 최근 출간한 ‘천문(天文)’은 그의 세 번째 시집이다.
신작 시집을 펴낸 그를 3일 오후 서울 광화문 인근에서 만났다. 철학적이고 관념적인 색채가 짙은 이번 시들은 생경한 한자 조어, 비문, 경전을 연상시키는 문체를 빌려 유려하면서도 고답적인 스타일을 빚어낸다. 그는 “상대적으로 서정과 감성의 테두리 안에 있었던 전작들에 비해서 확실히 이번 시집은 전환의 기점이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전환은 두 가지 점에서 이뤄졌다. 우선 경험적이고 파생적인 문제 대신 ‘불명확한 세상의 기원 찾기’라는 보다 근원적이고 추상적인 문제를 파고들었다. ‘천문’이란 제목도 ‘인문(人文)’에 대비되는, ‘우주적인 어떤 것’에 대해 이야기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기존의 시들이 가지고 있던 구조적 질서를 해체한 스타일도 주목할 만한 변화다. ‘부인이 괄태충처럼 사라질까봐 두렵다/그는 이러한 종류의 산문과 운문을 생의 모든 부분에서 반복했다/회색이 만든 아름답고 슬픈 시대/내가 그대에게 하루에 하나씩의 문밖을 던지는 것에 아직 방문객이 없던 시절/그늘을 잃었고 그날의 그림자를 모두 잃었다/괄태충처럼 사라질까봐 두렵다’(‘고전주의자의 성’)
이 같은 모호성에 대해 시인은 “불확정적인 세계에 대해 명확하게 말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난해하다는 평가에 대해서는 “오히려 쉽다”고 말했다.
“현대시는 음악이나 그림을 감상하듯 그저 뉘앙스를 읽어내면 되는 것 같아요. 음악이나 그림을 감상할 때 의미부터 분석하려 들진 않잖아요. 뉘앙스가 쌓인 뒤에 남는 것이 ‘의미’인 것이지, 정답은 없어요. 단지 관점만 있을 뿐이죠.”
첫 시집을 출간한 뒤부터 그는 전업시인으로 지내고 있다. 악기 연습 외에는 ‘대부분 독서와 글쓰기로 이뤄진 극히 단조로운 하루’를 보낸다. 스피노자, 니체 등 인문철학서의 열독자로서 그의 독서 체험은 상당 부분 시작(詩作)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면모는 시집에 빈번히 등장하는 ‘고전주의자’란 칭호나 수도승을 연상시키는 문장들과 잘 어울린다. 역설적이게도 그는 실험적인 시를 쓰면서 고전주의자이길 자청한다. ‘세상과 대면하는 스스로의 태도를 엄격화하는 것이 좋다’는 이유에서다.
“모든 것이 ‘별이 빛나는 창공’처럼 확실했던 고전주의자의 태도를 갖고 있기에 오히려 불명확하고 어지러운 근대 이후 세계의 혼란을 잘 포착할 수 있는 것 같다”고 그는 말한다. 모호함과 혼란으로 가득찬 이 세계에 선 고전주의자의 역설적 고민. 그의 시를 읽는 첫걸음을 여기서부터 떼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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