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전통문화의 종합선물세트인 ‘리버댄스’에서 중독성 강한 아이리시 스텝 댄스 군무를 펼치는 다국적 무용수들의 늘씬한 다리. 현란한 발놀림에 취하면 시련 속에서 꽃핀 아일랜드 문화의 다양한 묘미를 놓치기 쉽다. 사진 제공 마스트미디어
왜 ‘강의 춤’을 뜻하는 ‘리버댄스’로 이름을 붙였을까. 1990년대 중반 이후 아이리시 댄스 열풍의 원천이 된 ‘리버댄스’ 공연을 보면서 떠오른 질문이었다. 공연기획사 측은 ‘물방울 하나하나가 모여서 강을 이루고 바다에 도달하는 과정을 춤으로 형상화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2막 13장으로 이뤄진 공연은 처음부터 그 설명과 달랐다. 아일랜드 전통악기와 노래, 무용을 섞어 태양숭배에서 시작하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아일랜드의 전설과 역사를 형상화했다.
1막은 오늘날 아일랜드인의 조상인 켈트족의 신화와 전설을 펼쳐낸다. 청동기시대 전쟁영웅 퀴니 쿠할른,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굶주린 농민을 구한 백작부인 캐슬린, 나무에서 나무로 날아다니는 미치광이 스위니 등에 얽힌 전설들이다.
1막의 마지막 9장이 강의 여신인 리버우먼의 전설을 춤으로 그린 ‘리버댄스’다. 상체를 고정한 채 빠른 발놀림으로 추는 아이리시 스텝 댄스는 이 장에서 절정으로 치닫는다. 그렇다면 가장 인기 있는 에피소드 제목을 따온 것일까. 2막을 보면서 의문이 풀렸다.
2막에는 1845∼1848년 혹독한 대기근 이후 미국 등 신대륙과 유럽 도처로 이주한 아일랜드 이민자의 역사가 담겼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아이리시 스텝 댄스와 미국 흑인들의 탭댄스의 만남을 그린 12장이다.
아이리시 스텝 댄스는 다시 가죽밑창으로 된 신을 신고 추는 소프트 슈 댄스와 강화유리(과거엔 나무)로 굽을 댄 구두를 신고 추는 하드 슈 댄스로 나뉜다. 특히 하드 슈 댄스는 밑창에 금속 징을 박은 구두를 신고 발소리를 내며 추는 탭댄스와 닮았다.
12장에선 미국에 정착한 아일랜드 이민자들의 하드 슈 댄스와 흑인들의 탭댄스 춤 대결이 펼쳐진다. 관객은 이를 통해 현란한 발놀림과 리드미컬한 발굽소리를 이용한 두 춤의 유사성과 함께 미묘한 차이도 깨닫게 된다.
이어서 높은 점프와 시원시원한 발놀림을 자랑하는 러시아 민속무용과 빠른 발놀림으로 마룻바닥을 차면서 추는 스페인의 플라멩코 공연이 펼쳐진다. 역시 이곳으로 이주한 아일랜드인을 사로잡은 춤이다.
‘리버댄스’에서 아이리시스텝 댄스와 미국 탭댄스가 경연을 펼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마지막 13장 ‘홈 앤 하트랜드’는 연어처럼 다시 모천으로 거슬러 올라온 아일랜드인들의 춤이다. 이번엔 리버댄스의 춤과 선율에 탭댄스와 러시아 민속무용, 플라멩코가 하나로 어우러진다.
여기서 비로소 ‘리버댄스’의 의미가 뚜렷해진다. 아일랜드에서 기원한 전통문화가 한 줄기 강물을 이뤄 세계라는 바다에서 다른 강물들과 하나로 섞인 뒤, 다시 빗방울이 돼 아일랜드로 돌아가 새로운 정체성을 구성하는 과정을 춤과 음악, 노래로 형상화한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 공연은 아일랜드 전통문화의 종합선물이자 그와 유사한 민속예술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성찰이 가미된 퓨전음식이다.
이를 제대로 소화하기 위해선 메인 디시로 차려진 아이리시 스텝 댄스 말고도 아일랜드 역사와 문화에 대한 기초지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공연장 내 포스터나 안내책자 어디에도 이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스코틀랜드 백파이프를 닮았지만 입을 대지 않고 기압변화로 연주하는 일리언 파이프와 아일랜드 가죽북인 보드란 등 독특한 아일랜드 민속악기는 이름도 언급하지 않았다. 우리의 문화 향수(享受)가 눈요기에만 치우쳐 진짜 묘미는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되돌아보게 하는 무대였다. 5만∼15만 원. 14일까지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02-541-6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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