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클럽 동원해 온라인 주문… 아이디 바꿔가며 ‘구매’ 광클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3월 10일 03시 00분


‘유령 독자’ 만들기
여러명이 따로 주문했는데
배송지는 똑같아 딱 걸려
무료로 준 책 ‘판매’로 집계도

자정노력 효과 볼까
사재기 확인된 출판사 도서
3년간 ‘베스트’ 집계서 제외
내부신고자 보상제도 도입

서울 시내 한 대형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독자가 책을 고르고 있다(사진 속 책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이훈구 기자
서울 시내 한 대형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독자가 책을 고르고 있다(사진 속 책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이훈구 기자
《출판물불법유통신고센터(이하 신고센터)가 9일 네 곳의 출판사를 사재기로 신고한 데 대해 출판계에서는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만큼 베스트셀러 순위 상승을 위해 사재기로 판매 부수를 부풀리는 행위가 만연해 있다는 것이다. 출판계에서는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사기 행위인데도 사재기를 관행 정도로 여기는 풍토 때문에 사재기가 근절되지 않는다”며 “온라인 판매의 확대에 편승해 더욱 지능적인 형태로 발달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온라인 유통으로 더욱 확산돼

1990년대까지 사재기는 오프라인 서점 위주로 이뤄졌다. 출판사가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해 서울시내 대형 서점을 돌며 자사의 책을 무더기로 사도록 했다. 아르바이트생들은 하루에 30∼60권씩 특정 도서들을 구매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온라인 서점을 통한 사재기가 빈번하게 이뤄지고 있다. 백원근 한국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은 “2006년 1월 인터넷의 독서클럽 사이트 회원들이 동원돼 특정 도서를 집중 구매하는 인터넷 사재기가 공론화됐다”며 “오프라인 시절보다 더 점조직으로, 지능적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에 적발된 책들도 온라인 사재기 행위가 신고센터의 감시망에 걸렸다. 신고센터에 따르면 ‘마법의 돈 관리’의 경우 ID가 다른 회원들이 같은 주소지에서 집중적으로 주문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아버지의 눈물’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주문을 했는데 동일 주소지로 책이 배송됐다.

○ ‘유령 독자’에 ‘전문 대행업체’까지

신고센터 김형성 운영위원장은 “인터넷 서평카페와 공조해 책 구매를 유도하는 방식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중복구매를 한 회원 주소가 사람이 살만한 집이 없는 산골짜기 주소로 나오기도 한다”고 밝혔다. 사재기로 인해 ‘유령 독자’가 출현한 셈이다.

한국출판연구소가 한국출판영업인협의회 소속 197개 출판사의 영업 담당자를 대상으로 2007년 말∼2008년 초 실시한 사재기에 관한 설문조사에서 담당자들은 사재기 행위의 주체로 ‘출판사가 고용한 아르바이트생’ ‘전문 대행업체’ ‘출판사 직원’ ‘독서클럽 단체 및 회원’ 등을 들었다. 사재기를 전문으로 대행하는 업체까지 있음을 밝힌 것이다.

이 밖에 △특정인이 인터넷 서점에서 배송처를 달리해 동일 도서를 대량 주문하거나 △저자 사인회용 도서를 독자들에게 무료로 나눠준 뒤 서점 판매량으로 집계하는 것 등도 사재기 방법으로 꼽힌다.

○ 베스트셀러 따지는 구매 행위도 원인

한국출판연구소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출판사가 사재기를 할 경우 베스트셀러에 오를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81.2%가 ‘높은 편’이라고 답했다. 사재기 효과를 그만큼 실감한다는 뜻이다. 광고비보다 적은 돈으로 판매 순위를 쉽게 올릴 수 있다는 생각에 사재기의 유혹을 떨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소비자들의 책 구매 행태도 사재기를 부추기는 한 요인이다. 해마다 실시되는 국민 독서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소비자들은 책을 살 때 ‘내용’, ‘저자’에 못지않게 ‘베스트셀러 여부’를 중요하게 따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시장점유율이 높은 서점들의 베스트셀러 목록은 파급 효과가 크다. 이들의 베스트셀러 목록은 소비자의 구매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물론 출판 도매상과 중소형 서점들이 주문 판단 자료로 활용하기 때문이다. 출판인들은 “베스트셀러에만 집착하는 독서 행태로 인해 출판사들은 잘 팔리는 책만 내려 하고, 그 결과 양서(良書)가 설자리를 잃음으로써 결국 피해는 독자들에게 돌아간다”고 지적했다.

○ 사재기를 없애려면

신고센터가 이번에 예고한 제재 조치는 이전에 비해 매우 강력하다. 문화체육관광부에 의해 사재기 혐의가 확인될 경우 해당 출판사의 모든 책을 3년간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뺄 계획이다. 지금까지는 사재기로 확인된 책만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제외했다. 신고센터는 출판사 내부 신고자에 대한 보상제도도 도입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 같은 사후 처벌안보다는 베스트셀러 집계 시스템과 출판시장의 내부 정비가 선결 과제라는 지적이 일고 있다. 특정 서점에 영향력이 집중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전국 단위로 베스트셀러를 집계하거나, 집계는 하되 순위를 매기지 않고 공표하는 방법 등이 나오고 있다.

한편 이날 사재기로 신고를 당한 출판사 중 ‘4개의 통장’을 낸 D출판사는 공식 자료를 내고 “근거가 없는데도 사재기 혐의로 출판사의 이미지를 실추시켰으므로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밝혔다. ‘아버지의 눈물’을 낸 M출판사 관계자는 “어처구니가 없고 부끄럽다”고 말했다.

‘정성’의 V출판사는 “중복 구매자가 많다고 의혹을 제기하는데, 전국에 1200여 개 가게를 두고 있는 프랜차이즈업체의 내용이어서 해당 가게가 영업장 비치 목적으로 구매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설명했다. ‘마법의 돈 관리’를 펴낸 K출판사는 “책 한 권을 내놓으며 다각도로 마케팅을 추진하고 판매 전략을 전개한 것뿐인데 사재기 혐의를 받으니 억울하다”며 “신고센터에 소명자료를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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