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이론 맹종 바로잡자” 절반의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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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3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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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족 10년째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용어 우리말 정리 수준 벗고
한국적 관점 정립 시도 단계

“영어위주 학문 갈수록 위세
신규회원 가입 저조해 걱정”

우리말로 학문 체계를 새로 지어 나가자는 뜻을 품고 2001년 철학 문학 역사학 언어학 등 각계 학자 200여 명이 결성한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우학모·회장 최봉영 한국항공대 교수·한국학)이 올해로 10년째를 맞았다. 이들의 도전은 학계에 새로운 관점을 제기하고 우리말로 학문하기에 필요한 기초적인 틀은 세웠지만 참여 학자를 확대하지는 못해 아직까지는 ‘절반의 성공’에 그친 것으로 평가된다.

우학모는 “서양이 동양의 근대를 열면서 가져온 학문 속에는 그들의 문화와 가치관이 배어 있는 말과 개념이 가득하지만 서구 이론과 개념을 우리 식의 성찰 없이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지식인의 직무유기”라는 반성에서 시작됐다. 예를 들어 외래 심리학 용어를 사용하면 우리 문화의 독특한 현상인 ‘핑계, 정, 눈치, 한’ 등을 설명하기 어렵다. 학문을 하면서도 이런 현상을 무시해 온 것에 대한 반성을 우학모의 활동에 담은 것이다.

우리말로 새로운 학문적 관점을 세우는 일이란 어려운 작업이었다. 우리의 정서나 문화가 서구적 학문 틀에서 배제되는 현상을 극복하려 했지만 학문적 위험을 감수하고 여기에만 매달리기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컸다는 내부 평가다. 발기인은 200여 명이었지만 10년째인 현재 꾸준히 참여하는 학자가 50여 명에 불과한 것이 이런 어려움을 설명한다.

성과는 있었다. 우학모는 꾸준한 학술 활동에 힘입어 ‘우리말 학문하기’의 기초는 닦았다고 자평하고 있다. 구연상 숙명여대 교수(철학)는 “초기에 단순히 용어를 정립하던 수준에서 지금은 기초적이나마 새로운 학문의 틀을 제시하는 ‘발아 단계’에 왔다”고 말했다. 10년째를 맞으면서 용어 정리의 수준을 벗어나 우리말로 우리 관점을 세우는 시도가 시작됐다는 설명이다.

최봉영 교수가 제시하는 ‘우리말로 세운 새로운 정치학 관점’도 그 같은 사례다. ‘정치’는 기존 서구이론에 의하면 사회계약론에 따른 강자와 약자의 관계이며 이 때문에 권력을 제어하기 위한 삼권분립과 연결된다. 그러나 최 교수는 “정치를 ‘다스림’으로 새롭게 정리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권력이 정치의 목적이 아니며 한국적 정서에서는 ‘다 살리다’라는 의미를 가진 다스림의 눈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으로 정치를 학문화하면 모든 시민을 ‘고루’와 ‘두루’ 잘살게 하는 방법론도 만들 수 있다고 제안한다.

우학모는 지난 10년간 집담회(말나눔잔치)와 학술대회를 매년 2, 3차례 정례적으로 개최해 왔다. 삶과 학문을 주제로 한 대중 잡지 ‘사이’를 발행했으며 2008년부터는 논의 결과를 대중과 공유하기 위해 ‘우학모 글모음 시리즈’를 매년 출간하고 있다. 2008년 ‘우리말로 학문하기의 사무침(소통)’, 2009년 ‘우리말로 학문하기의 고마움’에 이어 최근 ‘우리말로 학문하기의 용틀임’을 출간했다.

최 교수는 우리말로 학문하기의 중요성을 퇴계의 사례에서 찾았다. 최 교수는 “퇴계가 주자를 뛰어넘을 수 있었던 것은 중국어로 되어 있는 개념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세분된 우리말로 세세하게 옮겨서 풀이했기에 가능했다”고 강조했다. 퇴계는 한학자의 인상이 짙지만 당대에 어느 누구보다 한문을 우리말로 풀어쓰는 데 뛰어난 학자였다는 설명이다.

발족 10년째를 맞은 우학로의 최대 고심은 ‘지속가능성’이다. 학문 후속 세대의 참여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모임의 총무를 맡고 있는 구 교수는 “모임이 10년째를 맞았지만 영어 위주의 학문 세력이 위세를 떨치면서 신규 회원의 참여가 거의 없다. 젊은 학자들의 참여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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