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비에서]출판계 공멸 재촉하는 ‘베스트셀러 조작’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3월 11일 03시 00분


출판계에서 공공연한 비밀로 회자되던 ‘사재기’ 사태가 또 터졌다. 9일 출판물불법유통신고센터는 사재기 의혹이 있는 출판사를 문화체육관광부에 신고하면서 ‘불법이 확인되면 해당 출판사의 모든 책을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3년간 제외하겠다’는 강도 높은 처방을 함께 내놓았다. 이는 불법유통신고센터까지 만들면서 자정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출판계 스스로 사재기를 막기에는 역부족임을 보여주는 징조로 보인다.

이번에 의혹을 받은 곳은 4곳이지만 출판계에 사재기가 만연해 있다는 징후는 곳곳에서 감지된다. 한 출판사 대표는 “좋은 기획으로 책을 내놓아도 베스트셀러 20위 이상으로 올라가면 주변으로부터 사재기 의혹의 눈초리를 받게 돼 부담스럽다”고 말할 정도다.

출판계 영업책임자를 대상으로 한 2009년 말의 설문조사에서는 4명 중 1명이 ‘사재기는 불가피한 마케팅의 한 측면일 수 있다’는 인식을 보였다. 출판문화진흥법에는 사재기를 명백한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여기에는 우리 문화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는 도서판매량과 그 경향이 왜곡돼서는 안 된다는 우리 사회의 동의가 깔려 있다.

베스트셀러 목록을 사재기를 통해 조작하려는 출판사는 독자를 우롱하면서 그들에게 책을 팔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책을 선택할 능력이 없으니 다른 사람의 선택을 따라 그냥 이 책을 사라’는 인식과 태도를 가진 것이다. 소비자의 심리에 대한 연구가 발전하면서 인간은 무심코 다른 사람의 선택에 이끌려 상품을 선택한다는 행동경제학의 연구 결과도 이런 출판계의 경향을 부추기고 있다.

출판계는 지금까지 다양성이 중요한 문화산업에 종사한다는 이유로 여러 혜택을 주장해 왔다. 최근에 다시 불거진 도서정가제를 둘러싼 논란도 그 사례 중 하나다. 다른 재화는 시장에 따른 가격 자율화가 이뤄지지만 책은 문화의 기본이자 씨앗이라는 점에서 시장으로부터 일정 부분 보호도 받고 있다.

사재기는 이런 명분을 거스르는 행위다. 갈수록 교묘하게 사재기를 한다는 소문이 무성하고 사재기 논란이 더 불거지다가는 출판계가 자기 몰락을 초래할 것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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