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주정뱅이에 고발꾼인 아빠와 그 아빠를 작신작신 두들겨 패는 택배회사 직원인 아들, 그 아들의 미성년자 동거녀, 오피스텔 건설현장의 함바집 아줌마, 마지막으로 그 아줌마의 전남편이 탐내는 교복의 주인인 중학교 1학년짜리 소녀가 야유회를 간다는 것이다.”
연극의 원작인 김영하의 단편소설에 등장하는 표현이다. ‘술주정뱅이 아빠’가 ‘함바집 아줌마의 전남편’이라는 연결고리만 이어주면 소설 속 상황은 깔끔하게 압축된다. 아비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가출했던 아들이 4년 만에 여자친구를 끼고 집으로 돌아와 아비를 폭력으로 제압한다. 그러자 가장의 횡포를 못 견디고 나가 살던 어미도 돌아와 아들 뒤에서 가족이란 울타리를 유지하기 위한 수렴청정에 들어간다. 하지만 영악한 여중생 딸은 폭력과 성욕에 지배되는 ‘동물의 왕국’을 닮은 그 가족의 허구성을 까발린다. 거기엔 한 줌의 연민도 없다.
스물다섯 쪽 분량의 소설은 그렇게 인간애의 최후 보루이자 안식처라는 가족에 대한 신화를 여지없이 흔든다. 처음엔 달짝지근하지만 뒤로 갈수록 쓴맛이 강한 블랙코미디다.
반면 연극은 연민 가득한 시선으로 그 ‘콩가루 패밀리’의 구성원을 재창조함으로써 해학 넘치는 휴먼 코미디를 구축한다. 아빠 이봉조(이문식)는 경쟁사회에서 탈락한 ‘루저’이자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전형적 소시민일 뿐이다. 엄마 심수봉(황영희)은 ‘마이마이’ 이어폰을 나눠 끼고 함께 ‘밤안개’를 들었던 낭만을 못 잊어 못난이 남편을 못 버린다. 아들 경식(이신성)과 고아 출신 동거녀 하소연(김다영)은 껍데기뿐이더라도 함께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는 가족을 꿈꾼다. 심지어 그들에게 계속 ‘썩소’를 날리던 여중생 딸 경희(류혜린)조차 그에 동화되고 만다.
각색과 연출을 맡은 고선웅 씨는 그렇게 원작의 냉소적 블랙코미디를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한 이야기로 변신시킨다. 패륜적 가정폭력은 권투 타이틀매치 경기를 닮아가고 음습한 성욕은 달빛 아래 체조로 둔갑한다. 폭력가장 아래의 우울한 가정환경은 “하루도 성할 날 없이 우리 꼰대한테 매 맞아 뒹굴어 ‘광빨’ 내던 이 마룻바닥아! 두툼한 입술로 너를 사뭇 눌러주마”는 식으로 천연덕스럽게 묘파된다. 아들 앞에 꼬리 내린 아빠의 대사는 또 어떤가. “평화로운 우리 집안에 암흑의 그림자가 드리웠구나. 어서(어디서) 탈레반 같은 양아치가 돌아와서 뼈대 깊은 가문에 먹물방울을 튕긴다.”
이렇게 거창한 표현을 상투화하는 고선웅식 화법은 비상식적 상황을 관객에게 친숙한 상황처럼 바꿔놓는다. “가족이 뭐? 거 별거 아냐.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몽둥이 들고 팰 수 있고 칼 들고 저을 수 있는 거야. 더 쉬워”라는 아빠의 대사처럼. 그렇지만 관객의 공감을 끌어내기 위한 이런 통속화 전략이 오히려 원작과 반대로 가족신화에 안주하는 결말로 이어진 것은 못내 아쉽다.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고선웅식 화법에 몰입하면 등장인물의 캐릭터가 비슷해지는 부작용을 초래한다. 배우들은 그 함정에 빠지지 않고 개성 넘치는 연기를 통해 자기 배역에 풍부한 입체감을 부여했다. 특히 영악함과 어수룩함이 교차하는, 미워할 수 없는 아빠를 연기한 이문식 씨와 억센 ‘아줌마’와 농염한 ‘여인’을 오간 황영희 씨의 연기가 일품이다. 앳된 얼굴로 닳고 닳은 애늙은이를 연기한 신예 류혜린 씨의 연기도 주목할 만하다. 아빠 역으로 이한위, 김원해 씨가 번갈아 출연한다. 3만5000원. 5월 30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동숭소극장. 02-766-6007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