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건축을 말한다]<11>김영준의 파주 ‘학현사’ 사옥

  • Array
  • 입력 2010년 3월 17일 03시 00분


코멘트

낯선 미로 속에서 일상의 새 길을 만나다

지난해 7월 완공한 경기 파주시 출판단지의 ‘학현사’ 사옥을 동쪽에서 바라본 입면. 세 개의 직육면체를 늘어놓은 단순한 건물로 보이지만 그 안에 뜻밖의 ‘미로’가 숨어 있다. 사진 제공 yo2
지난해 7월 완공한 경기 파주시 출판단지의 ‘학현사’ 사옥을 동쪽에서 바라본 입면. 세 개의 직육면체를 늘어놓은 단순한 건물로 보이지만 그 안에 뜻밖의 ‘미로’가 숨어 있다. 사진 제공 yo2
《“어떻게 집안에 보이는 게 죄다 복도뿐입니까?” 김영준 yo2건축 대표(50)는 2002년 경기 파주시 탄현면 헤이리 예술마을의 한 주택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건축주 가족의 반대에 부닥쳤다. 건축주인 영화감독 박찬욱 씨는 ‘미로 같은’ 설계안에 대한 가족의 의심을 무릅쓰고 김 대표를 끝까지 믿어줬다. 우여곡절 끝에 2005년 완공한 이 주택 ‘자하재’는 그해 한국건축가협회상과 한국건축문화대상을 받았다.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은 이 건물과 승효상 이로재 대표가 설계한 경기 남양주시 ‘수백당’ 등의 모형을 선보이는 특별전을 11월에 마련할 예정이다.》
“규격화한 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더 쉽게 길을 잃어
미로는 만남의 길… 삶의 지루함 줄고 소통은 늘어”


1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이화동 사무실에서 만난 김 대표는 “박 감독이 여기 위층에 영화사 사무실을 냈는데 집에 대해 별 얘기를 안 하는 걸 보니 그럭저럭 살 만한가 보다”라며 웃었다.

“건축은 사용자에게 ‘평범한 친절함’만을 제공해야 할까요? 주택이나 사옥처럼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정해진 사람이 사용할 공간은 익숙한 형식에 안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설계 과정에서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죠. 시간이 흐르면 사람들은 새로운 공간에 맞는 새로운 생활방식을 도출해 냅니다. 그때 건축은 비로소 흥미롭게 완성되는 것이고요.”

13일 오전 찾아간 파주시 교하읍 문발리 출판단지의 ‘학현사’도 미로를 닮은 건물이었다. 건축면적 1065m²의 땅에 세 개의 길쭉한 4층 높이 직육면체 블록을 나란히 붙여 세워 연결한 형태. 다양한 크기의 내부 단위공간이 결합하면서 흐름을 예측하기 어려운 통로가 복잡하게 얽혔다. 처음 방문한 사람은 안내인의 도움 없이 옥상까지 오르기가 쉽지 않다.

“정리되지 않은 것과 익숙하지 않은 것은 다릅니다. 특정 사용자가 오랫동안 쓸 공간에 미로를 만들어 놓으면 일상의 지루함을 덜어줄 수 있어요. 요즘 사무실 건물은 대개 정문에 들어서자마자 최소한의 통과점을 지나 자기 위치로 갈 수 있도록 만들어지죠. 그러면서 ‘소통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율배반입니다.”

한 공간에 머무는 사람들 사이에 관계를 형성하려면 다양한 장소에서 얼굴을 자주 마주치게 하는 방법이 최선이라는 설명이다.

1층 계단실. 양쪽 벽의 유리창은 필요할 경우 개방해 출입구로 쓸 수 있다. 사진 제공 yo2
1층 계단실. 양쪽 벽의 유리창은 필요할 경우 개방해 출입구로 쓸 수 있다. 사진 제공 yo2
“용도에 맞게 규격화한 공간을 복제해 나열한 곳에서 사람은 오히려 더 쉽게 길을 잃습니다. 어디를 가든 비슷비슷해 보이기 때문이죠. 미로의 ‘장소성’은 공간을 독창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리스의 산토리니 섬처럼 자생적으로 성장한 공간이 갖는 근사함을 어떻게든 비슷하게라도 구현해 보려 했습니다.”

자생적 공동체 공간의 재생에 대한 김 대표의 고민은 개별 건물 안에 머물지 않는다. 2002년 승효상 대표, 민현식 김종규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플로리안 베이글 영국 북런던대 교수와 함께 마련한 파주 출판도시 공동주거 설계지침도 ‘공동체의 삶이 결핍된 공동주거 관습’으로부터 탈피하는 데 역점을 뒀다. 서울 종로구 구기동에 계획 중인 도심 공동주거에도 ‘부대끼며 살아가는 삶’으로의 회귀 방법에 대한 고민을 담았다.

용도에 따른 내부 공간 계획과 사용자 간 교류 방식에 집중한 건물의 외형은 딱히 그럴듯하지 않다. 2005년 김수근문화상 수상작인 경기 고양시 허유재 병원 등 다른 건물의 겉모습도 김 대표의 표정과 말투처럼 무뚝뚝해 보인다. 거기에는 톡톡 튀는 조형(造形)에 몰두하는 현대 건축의 경향에 대한 비판의식이 담겨 있다.

“수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이 도시 공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답안일까요? 멋있는 스케치를 구체화한 조각 같은 건축물이 사람들이 일상에서 붙들고 고민하는 문제를 얼마나 해결하는지 의문입니다. 개인적 영감에서 얻은 형태를 구현하는 건축의 역할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어요.”

그는 매끈한 문화시설이나 폼 나는 랜드마크 빌딩에 관심이 없다. 공동주거 등 도시공간의 묵은 숙제를 풀어갈 대안을 찾는 게 건축가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직접 설계해 세운 그의 사무실 건물에서는 광택 나는 고급 마감재가 조금도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창밖 빗소리를 들으며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직원의 움직임은 부족함 없이 편안해 보였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 김영준 대표는…

△1983년 서울대 건축학과 졸업, 1985년 동 대학원 석사 △1983∼1989년 공간사, 공간연구소 △1990∼1995년 종합건축사사무소 이로재 △1996∼1997년 네덜란드 로테르담 OMA 근무 △1998년 yo2(김영준도시건축) 대표 △2001∼2009년 한국예술종합학교 튜터 △2005년 한국건축가협회상(자하재), 김수근문화상(허유재 병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