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을 가지고 노는 것은 어린이들만이 아니다. 다 큰 어른들도 인형놀이를 한다. 어린 시절의 동반자였던 오래된 곰인형 이야기가 아니다. 진짜 사람을 닮은 인형 ‘리얼 돌’말이다. 2002년 미국에서 제작된 ‘리얼 돌’은 피부를 실리콘으로 처리해 실제 사람의 피부처럼 말랑말랑하고 손가락, 발가락, 무릎 등의 모든 관절이 움직인다. 외로운 독신남녀의 성욕 해소용으로 제작됐지만 이 리얼 돌과 진짜 사랑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영화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의 남자 주인공처럼.
이 ‘리얼 돌’을 소재로 한 연극이 등장했다. 서울 종로구 대학로 행복한극장에서 공연 중인 ‘리얼 러브’(연출 이현규)다. 200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희곡 당선자인 이윤설 씨의 2008 파파프로덕션 창작희곡공모 우수상 수상작이다.
주인공은 두 명의 남녀. 오피스텔 이웃인 서른일곱 소방관(남자)과 서른다섯 주차단속원(여자)이다. 남자는 불만 끄러 다니다 정작 자신의 가슴에 불 한번 질러보지 못했고 여자는 주차단속 딱지만 붙이다가 ‘처녀딱지’도 못 뗀 외로운 영혼들이다. 바로 옆집에 서로에게 맞는 짝이 기다리고 있건만 둘은 인연을 쌓아가는 것을 귀찮아한다. 어렵게 맺은 관계가 빗나갈 경우 받을지 모를 상처도 두려워한다.
사랑이 눈물의 씨앗이라면 눈물 또한 사랑의 씨앗임을 외면하는 두 사람은 상처 받을 일도 없고, 책임질 일도 없다면서 각각 친구가 선물한 ‘리얼 돌’을 집에 들인다. 밖에선 외롭고 슬퍼도 흔들리지 않던 두 사람이지만 인형과 단 둘이 남으면 닭살 애정행각을 마다않으면서 점차 인형과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일방적인 관계일 줄 알았던 ‘리얼 러브’도 상처를 주고 질투도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유효기간 3개월이 지난 뒤 흐물흐물해지는 인형을 지켜보면서 지독한 이별의 아픔을 맛본다.
연극엔 ‘리얼 돌’이 등장하지 않는다. 상대 배우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 무표정한 인형과 온갖 감정을 분출하는 인간을 번갈아 연기하는 것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2개의 의자를 제외하곤 블랙박스처럼 텅 빈 무대에 조명을 통해 공간을 창출한 실험적 무대연출도 신선하다. 봄철 건조한 날씨에 가슴마저 바짝 마른 영혼들이라면 눈물을 흘릴 법도 하다. 이용한 추현옥 김원식 이미선 출연. 2만5000원. 4월 18일까지. 02-747-2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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