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리표 자전거에 올라탄 기이한 로봇. 몸통은 주유소의 기름 넣는 고물기계가 대신하고, 머리엔 둔탁한 잠수모를 쓰고 어깨에 모직 담요를 두르고 있다. 그 뒤 흰 벽면에 “황색재앙, 그것이 바로 나다”라는 문구가 씌어 있다. 로봇의 이름은 ‘칭기즈칸’. 백남준이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 독일 대표로 참가해 황금사자상을 받았을 때 선보인 작품. ‘황색 재앙’은 칭기즈칸이 이끄는 몽골 군대가 유럽에 나타났을 때 백인들이 두려움으로 외친 말이다.
경기 용인시 기흥구 상갈동 백남준아트센터의 올해 첫 전시 ‘랜덤 액세스(Random Access)’전에서 만난 작품이다. 에릭 안데르시 컬렉션 등에서 구입한 신소장품과 더불어 전면 개편한 1층 상설전. 백남준의 6개 작품과 브루스 나우먼, 아라키 노부요시, 장영헤중공업 최태윤 양아치 등 국내외 작가의 작업을 연계해 구성한 2층 기획전을 아우른 전시다.
뜻밖의 만남, 임의적 접속을 의미하는 ‘랜덤 액세스’는 1963년 독일 부퍼탈에서 열린 백남준의 첫 번째 개인전에서 등장한 작품의 제목.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우연과 비결정성, 관람객과의 상호작용과 참여 등 백남준이 추구한 작품의 핵심가치를 상징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이 개념을 우직하게 파고든 전시는 미술관이 축적한 내공을 보여주는 풍성한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소장품을 소개하는 박제된 전시가 아니라 현대적 해석과 담론을 이끌어내기 위한 시도란 점에서 주목에 값한다.
이영철 관장은 “백남준의 세계는 제대로 그 의미가 밝혀지지 않았다. 이제부터 우리 센터가 백남준을 읽는 코드를 하나하나 밝혀갈 것이다. 개관 후 2년간 연구한 성과로 만든 총서 ‘백남준의 귀환’를 바탕으로 구성한 전시는 백인이 주도하는 서구 미술계에 뛰어든 백남준을 몽골 코드로 접근해본 기획전”이라고 소개했다.
신소장품 중에선 백남준이 1989년 제작한 ‘비디오 상들리에’를 비롯해, ‘달에 사는 토끼’과 다양한 드로잉을 볼 수 있다. 젊은 작가들과 어우러진 그의 작품은 새로움에 무뎌진 오늘의 관객에게도 경이와 감각적 체험을 안겨준다. 독창성과 사유의 깊이, 상상력에 있어 늘 새롭게 해석될 수 있는 대가. 역시, 백남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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