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나라 경공은 말 4000필을 소유했지만 죽는 날에 사람들이 덕이 있다고 칭송하는 일이 없었고, 백이와 숙제는 수양산 아래서 굶주렸으나 사람들이 지금에 이르도록 칭송하고 있다.
‘논어’ ‘季氏’의 이 글은 제11장의 후반이라 보기도 하지만 주자의 설을 따라 제12장으로 간주한다. 孔子曰이 없고 끝 부분은 다른 곳에 더 있는 등, 혼란이 있다. 단, 취지는 분명하다. 부귀한 자가 칭송받는 것이 아니라 특이한 덕을 지닌 인물이 칭송받는다는 것이다. 千駟의 駟는 4필의 말을 한 단위로 삼는 글자다. 無德而稱은 德 있다고 칭송하는 일이 없다는 뜻이다. 옛 텍스트에는 德이 得으로 되어 있고 而도 없었다고 하니, 그렇다면 ‘칭송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齊나라 景公은 靈公(영공)의 아들인데 대부 崔저(최저)가 莊公(장공)을 시해하고 옹립한 제후다. 그가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는 ‘君君, 臣臣, 父父, 子子’의 여덟 자를 일러주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공자를 등용하지 않았다. 경공은 牛山에 노닐다가 도성을 내려다보고 “강물이 질펀히 흐르는 이 고장을 버리고 어떻게 죽는단 말인가!”라고 탄식했는데 晏子(안자)는 ‘莊公과 靈公이 죽지 않았다면 임금께서 어떻게 이 자리에 있겠습니까’라고 비웃었다. 세금을 무겁게 부과하고 형벌을 가혹하게 시행했으며 첩의 아들을 태자로 세워 훗날 난을 초래했으니, 칭송할 만한 인물이 아니다.
伯夷와 叔齊는 孤竹國의 왕위를 서로 양보하다가 함께 나라를 떠나, 周나라 武王의 은나라 토벌을 不義하다 여겨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먹다가 굶어죽었다. ‘述而’편에서 공자는 그들이 求仁得仁했기에 아무 원망이 없었다고 했다. 求仁得仁이야말로 남에게 칭송을 받을 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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