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 경계 대폭 강화 필요” 동포의 유해수습 우려한듯
독립운동가 89명 추가 확인…김구, 친일파 암살 지령도
‘하얼빈에서의 살인사건으로 입감한 한국인 9명은 엄정 격리할 필요가 있으므로 모두 독거 구금한 결과 구금감이 다소 협애하여 다른 감방은 정원 이상을 구금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피고사건의 중대함으로 인해 계호자의 선정 및 사건의 성질상 감방 내외를 엄중히 경계할 필요가 있다.’(1909년 10∼12월 정황보고)
‘구금 중인 살인 피고인 안중근 외 수명은 피고사건의 중대함에 따라 제반 관계상 엄중한 단속이 필요하였다. 특히 2월 7∼14일 기간은 연일 법원에 출정하기 때문에 미리 위험을 우려하여 압송마차를 설비함으로써 연도의 왕복을 경계했으며, 법정 내에서 경호상의 단속도 실로 고심을 극하였다.’(1910년 1∼3월 정황보고) ○ 사형 명령 이틀 만에 집행
안중근 의사(사진)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뒤 뤼순(旅順)감옥에 있는 동안 일제가 감옥 경계를 대폭 강화했다는 내용 등이 담긴 일본 문서가 발견됐다. 일제가 안 의사 수감 이후 경계를 대폭 강화한 것은 한국 동포에 의한 유해 탈취를 예방하려는 의도와 함께 유해의 고국 안장으로 향후 안 의사 묘지가 성지화돼 항일운동의 본령 역할을 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국가보훈처는 22일 관동도독부(일제 식민행정기관)의 안 의사 사형집행 보고서와 정황보고·잡보(1∼15권), 증거품 목록 등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이 자료들은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 보관돼 있던 것으로 보훈처가 최서면 도쿄 국제한국연구원장 등 한일 근대사 전문가들과 함께 일본의 자료공개법 등을 이용해 지난달 찾아낸 뒤 복사물을 국내로 들여왔다.
안 의사에 대한 사형집행 명령기록 원본은 일제가 1910년 2월 14일 안 의사에 대한 사형을 선고한 뒤 3월 24일 사형을 집행하라고 명한 내용이다. 안 의사의 사형은 명령 이틀 만에 집행됐다. 이 명령기록에는 안 의사의 주소를 ‘한국 평안도 진남포’라고 기재하고 있다. 직업(무직)과 이름(안응칠) 나이(33세) 죄명(살인범) 형명(사형) 판결언도일(1910년 2월14일) 등도 명시하고 있다. 응칠은 안 의사의 아명이다.
○ “두 동생의 유해 인도 요구 거절”
안 의사의 증거품 목록으로는 당시 러시아 측에서 발간했던 한자신문인 ‘원동보’ 1부와 이토 암살을 암시한 ‘동청철도 기차 발착시간표’, 그리고 손가방 등이 적혀 있다. 사형 직후 안 의사의 동생들이 유해를 돌려달라고 요구했으나 이를 거절한 내용이 담긴 ‘두 동생의 유해 인도 요구에 대한 처리 경위 보고’ 원문도 확보됐다.
안 의사의 동생 안정근이 안 의사의 사진으로 5종의 엽서를 만들어 미국 하와이에 300장, 샌프란시스코에 500장을 보냈다는 기록도 안 의사 사진과 함께 발견됐다. 일본감옥협회가 1910년 1월 20일 발행한 감옥협회 잡지는 안 의사에 대해 ‘보통의 형사 피고인이지만 국사범과 동격으로 취급되고 있다’고 기록했다.
이와 함께 1920년대 초반 일본 관동청 경무국이 작성한 문서(관동도독부 정황보고·잡보)에는 안 의사와 김구 선생을 비롯한 주요 독립운동가 228명의 행적이 담겨있다. 이 중 89명은 이번에 최초로 확인된 인물이다. ○ 김구 등 독립운동가 행적 기록도
1922년 3월 23일 작성된 ‘상하이(上海) 임정(臨政) 북만(北滿) 불령선인(不逞鮮人)단 연락’ 부문에서는 상하이 임시정부 경무국장이던 김구 선생이 만주와 시베리아 방면에 연락해 일본 관리의 내정을 정탐하고 친일 조선인 암살을 지령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상재 선생에 대한 기록도 있다. 안동경무서장이 보고한 이 문서에는 이상재 선생의 직업이 ‘조선기독교연합청년회 총무’로, 나이는 73세로 적혀 있다.
김양 보훈처장은 “안 의사 유해를 어디에 매장했는지 관련 자료도 받지 못하고 있지만, 우리가 보지 못한 안 의사와 관련한 사진과 자료가 일본 외무성 사료관에 더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며 일본 측의 더욱 성의 있는 자세를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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