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흔아홉 해 전 우리 집/우물 곁에서 베어진 살구나무이다/내가 막 세상에 나왔을 때 내 몸에서는/살구향이 짙게 뿜어져 나왔다고 한다/오랫동안 등허리엔 살구꽃 그림자가 드리워졌고/목울대엔 살구씨가 매달려 있었다/차츰차츰 살구꽃 그림자는 엷어졌으나/서러운 날 꿈자리에서는 늘 우물 곁으로 돌아가/심지 굳은 살구나무로 서 있곤 한다/그럴 때마다 전설과도 같은 기쁨과 슬픔들이/노란 전구처럼 오글조글 새겨진다”(‘살구꽃 그림자’ 중에서)
전생에는 아마 살구나무였으리라 믿는 누군가. 밥벌이에 지치고 세파에 시달린 날, 꿈자리에서 우물 곁으로 돌아가 심지 굳은 살구나무가 되는 장면이 가슴 찡하고 아름답다. 시인은 이 시집의 후기에 “한동안 나를 지탱해준 힘은 이들에게서 나왔다. 아무것도 아니지만 실제로는 구체적인 그 무엇들이 나를 이끈다. 이를테면 고향집 사랑방 흙벽을 감싸고 있는 그을음. 아롱지는 그리움을 채워가는 거미줄. 지금은 안 계시는 어머니 아버지의 바지런한 움직임들”이라고 썼다. 올해로 등단 21년을 맞은 시인의 세 번째 신작 시집. 소박하고, 정겹고, 가슴 서늘하게 그리운 것들로 채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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