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공 정권의 철권통치가 극에 달했던 1987년. 그해 1월17일자 동아일보 사회면(7면)에는 ‘좁은 수사실 바닥에 물기가 있었다’는 2단 크기의 기사가 실렸다. 14일 서울대생 박종철 군이 서울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다 숨진 사건의 속보였다. 당시 경찰은 “조사관이 주먹으로 책상을 ‘탁’ 치며 혐의사실을 추궁하자 갑자기 ‘억’ 하며 쓰러졌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뭔가 미심쩍다고 여긴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들은 밤낮을 잊은 채 숨 막히는 취재에 들어갔다. 17일자 기사는 박 군을 처음 검안한 중앙대부속용산병원 내과 전문의 오연상 씨의 말을 근거로 물고문에 의한 사망 가능성을 처음으로 제기한 것이었다. ‘단순 쇼크사’로 넘어갈 뻔했던 이 사건은 동아일보의 잇단 특종으로 고문치사와 축소은폐조작 사실까지 드러났다.
당시 정권은 ‘사회면 4단 게재’ 등의 보도지침을 통해 이 사건의 파장을 축소하려 했으나, 동아일보는 19일자에 ‘물고문 도중 질식사’라는 제목으로 1면 톱으로 실으면서 하나하나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 나갔다. 잠잠해진 듯했던 이 사건은 그해 5월 박 군 고문에 가담한 경관을 2명으로 축소 은폐했던 관계기관 대책회의의 실체가 동아일보 보도로 드러나면서 내각 총사퇴와 6월민주항쟁→6·29선언→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으로 이어지는 민주화의 기폭제가 됐다.
이듬해에도 동아일보는 박 군 사망 1주기를 맞아 1988년 1월 12일자 사회면에 박 군의 시신을 부검한 황적준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1과장의 일기장 등을 근거로 ‘치안본부장 등 경찰수뇌들 고문치사 처음부터 알았다’는 제목의 특종기사를 내보냈다. 일련의 보도는 1987년과 1988년 연달아 한국기자상을 수상했다.
1920년 창간 이후 동아일보가 90년간 쉼 없이 쏟아낸 특종보도들은 암울했던 근현대사의 고비마다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계기가 됐다. 창간 보름 만인 4월 15일 ‘평양에서 만세소요’ 기사를 내보냈다가 발매금지를 당하는 등 동아일보는 창간되자마자 일제의 거센 탄압을 뚫고 나라 잃은 ‘민족의 입’ 역할을 했다. 1922년 8월 1일자에는 일본 니가타(新潟) 현에서 벌어진 ‘조선인 근로자 학살사건’을 특종 보도했다.이상협 당시 편집국장은 일본 현지에 급파돼 취재활동을 벌였고, 1년 뒤인 1923년 9월 1일 발생한 ‘일본 간토(關東)대지진 한국인 학살사건’ 때도 파견돼 한국인 사망자 명단을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1926년 6·10만세사건 직후에는 ‘순종 인산(因山)’ 녹화 필름을 전국에서 순회 상영했고, 1927년에는 전국 수리조합실태를 취재해 일제의 농민 수탈 실상을 폭로했다. 1936년 8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을 제패한 손기정 선수의 금메달 시상식 장면에서 손 선수의 가슴에 있던 일장기를 지워버린 사진을 게재했던 ‘일장기 말소사건’은 일제에 대한 저항의지를 고취한 ‘사진 편집 특종’이었다.
끈질기게 진실을 파고드는 동아일보의 기자정신은 광복 이후에도 계속 빛을 발했다. 1960년 자유당 정권이 영구집권을 노리고 선거 부정을 저지르자 동아일보는 3월 15, 16일자에 ‘사복경관이 공개투표 지휘’ 등 부정선거를 비판한 보도 등으로 4·19혁명을 이끌었다. 민주화 이후인 1993년 ‘김영삼 정부 조각검증’ 보도는 한국 언론사에 인사검증 취재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1995년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파문 최초 보도’ 등 부패권력의 실상을 폭로한 기사들은 권력을 견제하고 감시하는 비판정신이 번뜩인 특종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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