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한식, 최고를 키워라”

  • Array
  • 입력 2010년 4월 2일 03시 00분


코멘트

광주요그룹 조태권 회장이 베푼 ‘한식 세계화’ 만찬

한 살배기 흰색 진돗개가 가장 먼저 손님들을 맞았다. 지난달 25일 오후 7시 무렵 서울 성북구 성북동의 2층 단독 주택. 집주인이자 이날 저녁 식사의 초대자는 조태권 광주요그룹 회장(62)이었다. 그는 얼마 전 백발에 눈웃음, 그리고 호탕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집에 와서 밥 먹고 가요.”

그렇게 동아일보 기자 5명은 이날 조 회장 자택에 초대받았다. 대문에 들어서 용 문양이 바닥에 새겨진 돌계단을 오르자 박물관 같은 응접실 광경이 펼쳐졌다. 몇 년 전 호암아트홀이 빌려가 전시회를 열었다는 조선시대 나무 탁자, 부리가 매끄럽게 잘생긴 목조 오리, 옥빛이 단아하게 감도는 화병…. 젊은 날부터 재일교포 아내와 의기투합해 사 모았다는 한국의 옛 가구와 소품들이었다.

“문화적 안목이 하루아침에 길러지는 게 아니듯 한식 세계화는 결국 좋은 한식을 많이 체험해봐야 이뤄집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모셨어요.” 조 회장은 조만간 국내외 외교관 부인들도 집에 초대해 음식을 대접할 것이라 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지극 정성을 들여 한식을 홍보하는 조 회장.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한식 세계화의 전도사’라고 부른다.

응접실로 웰컴 드링크가 나왔다. 좁고 기다란 샴페인 잔에 담긴 노란색 술. 잔 속에는 여자 새끼손가락만 한 유자꽃, 매듭 모양의 라임 껍질이 함께 담겼다. “유자청 칵테일입니다. 41도 화요(광주요가 만든 고급 증류식 소주) 25mL와 유자청 25mL를 섞어 얼음을 넣은 후 라임즙 5방울과 소다수 50mL를 넣었죠. 그러면 10도가 약간 넘는 마시기 편안한 알코올 도수가 됩니다.” 백자에 담긴 말린 자두와 치즈를 곁들이니 식욕이 절로 돋았다. 음식은 담는 그릇에 따라 격이 달라졌다.

“자, 이제 식당으로 자리를 옮길까요?”

조 회장과의 2시간여 ‘품격 있는 한식 코스’ 식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 “톱이 제대로 되면 한식도 자연스레 세분화”

6인용 식탁 위에는 연분홍색 튤립들이 나지막한 유리 볼에 담겨 수줍은 듯 분위기를 띄웠다. 자리를 잡고 앉자 수국 문양의 푸른색 비단 천이 무릎 위에 놓였다. 노트북보다 조금 더 큰 직사각형의 흰색 도자판(1인용 식기 매트를 도자기로 만든 것)은 앞으로 서빙될 음식이 놓일 곳이다. 봄의 홍매화가 붓글씨처럼 수려하게 그려져 있다.

“개인상에 담았다는 느낌을 주려고 도자판을 만들었어요. ‘한식은 한끼 음식을 한상에 담아야 한다’는 생각은 제사상의 영향이죠. 세계 인구 중 20억 명이 코스 요리를 먹지 않습니까. 그러니 한식도 당연히 코스 요리로 외국인들에게 다가서야죠. 일단 그들에게 익숙한 방법으로 한식을 알린 후 한상 차림도 경험하게 하는 게 순서예요.”

애피타이저로 처음 오른 음식은 청자에 담겨 나온 ‘더덕을 곁들인 새우 애탕국’이었다. 쫄깃한 식감을 위해 새우를 일부는 다지고 일부는 갈아 완자를 만들었다. 잣즙으로 무친 더덕과 청경채를 양지 육수에 넣어 끓인 국물은 맑고도 시원했다. 부드러운 음식엔 부드러운 술을 곁들여야 한다며 조 회장은 17도 증류식 소주 ‘화요’를 반주로 권했다.

그는 말문을 이어 나갔다. “작가 말콤 글래드웰의 ‘티핑 포인트’란 책에서 한식에 접목할 세 가지를 배웠습니다. 소수의 힘, 고착성, 상황의 힘이죠. 처음엔 소수가 이끌어 나가면 고착성이 생기고 여기에 상황의 힘이 더해져 결국 ‘빵’ 터지는 겁니다. 김연아 선수가 한국 피겨스케이팅의 역사를 새로 썼듯 한식도 ‘톱’을 키워야 합니다. 값싸고 푸짐하면 음식의 격은 떨어지게 마련이에요. 톱은 오르기 어려워 그렇지 한번 오르면 좀체 내려오지 않습니다. 10만 원짜리 밥이 있어야 5만 원, 3만 원짜리도 나옵니다. 한식은 진정한 톱이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톱이 제대로 되면 자연스럽게 한식이 세분화될 수 있습니다.”

한식은 비싸면 안됩니까? 가치있게 만드냐가 문제죠

○ “한식의 가치 과소평가하지 말자”


두 번째 요리는 ‘돌나물 무침을 곁들인 게살전과 참나물전’이었다. 새콤달콤한 돌나물 무침은 한국의 봄맛이었다. 생막걸리를 항아리에서 발효시켜 만든 막걸리 식초와 고춧가루로 만든 양념이 그 맛을 이룬 비법이었다. 참나물전에는 단호박을 채쳐 가니시(garnish·음식에 곁들이는 장식)로 올렸다. 베어 물자 ‘바삭’ 소리가 났다. 바삭함의 비결은 전의 반죽을 최대한 묽게 만드는 것이라고 이 음식을 만든 김병진 광주요그룹 셰프는 귀띔했다.

조 회장은 2003년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최고급 한식점 ‘가온’을 열었다가 5년 만인 2008년 누적 적자로 폐업한 쓰라린 경험이 있다. 당시 사람들은 “조 회장이 너무 앞서 갔다”는 평가도 했다. 좋든 싫든 ‘아픈 기억’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내가 아니면 또 누가 했겠냐”고 반문했다.

“가온에 왔던 한 손님이 ‘여기 김치찌개는 왜 이렇게 비싸냐’고 따져 직원들이 난감해한 적이 있었습니다. ‘미국 뉴욕의 최고급 식당에서 나오는 달걀 프라이와 기사 식당의 달걀 프라이가 어떻게 다르겠느냐’고 그 손님에게 되물으라고 했죠. 그 둘은 재료에서 시작해 상에 놓이기까지 모든 맥락에서 같은 음식이 아닙니다. 가치가 다르죠. 왜 유독 한식의 가치에 대해서는 그토록 인색할까요.”

세 번째는 ‘청도 한재미나리를 곁들인 개성편수’. 개성편수는 메밀가루로 만든 만두피에 다진 돼지고기와 김치 등으로 만든 소를 채워 찌거나 끓인다. 달래간장(달래에 국간장과 양조간장을 6 대 4 비율로 배합해 넣은 것)을 곁들여 경북 청도산 한재미나리와 함께 씹으니 쫀득했다. 한재미나리는 줄기 속이 꽉 차 씹는 맛과 향이 좋다고 소문난 미나리다.

○ “세계인의 지성과 감성을 자극하라”


네 번째 나온 ‘대파, 생강향의 삼겹살 찜’은 술 생각이 절로 나게 하는 ‘술 도둑’이었다. 각 손님 앞에 놓인 술잔엔 17도에 이어 25도 화요가 부어지고 비기를 반복했다. 삼겹살은 잡냄새를 없애기 위해 생강즙에 일단 절였다. 이후 팬에 한 차례 구워낸 다음 생강, 대파, 간장 등으로 만든 소스에 거듭 재워 밀폐 상태로 쪘다. 그리고 다시 250도로 예열한 오븐에서 2시간 반을 구웠다. 이런 수고 끝에 기름기가 쪽 빠진 삼겹살을 두툼하게 썰어 대파 채와 어우러지게 했더니 고급스러운 풍미였다. 고추냉이와 으깬 감자를 삼겹살과 함께 입에 넣자 느끼함이 없었다.

다섯 번째 ‘달래무침과 아롱사태 편육’. 아롱사태 편육은 된장을 풀어낸 물에 삶아낸 뒤 뜨거운 상태에서 랩으로 싸 모양을 잡아 얇게 썰었다. 가볍게 두드려 얇게 펼친 더덕을 간장과 참기름을 발라 구워냈더니 그 맛의 궁합이 썩 좋았다.

조 회장은 2007년엔 미국 내파밸리 지역에 한국의 그릇, 음식, 술을 모두 가져가 외국인들에게 한식의 진수를 선보이는 이벤트도 열었다. 국내 유명 재계 인사들도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그곳의 유명 와이너리 사장들은 자신들이 최고로 꼽는 빈티지의 와인을 각자 들고 와 “한식이 슬로 푸드라 몸에 좋다죠?”라며 한식을 한껏 즐겼다. 음식은 외교의 꽃이었다.

이날 저녁식사 참석자들이 최고의 맛으로 꼽은 요리는 여섯 번째 나온 ‘개성식 돼지갈비 구이’다. 돼지 등갈비를 새우젓, 대파, 마늘, 생강, 고춧가루, 참기름, 깨소금으로 만든 양념에 버무려 팬에 초벌구이를 하고 41도 화요를 부어 잡 냄새를 날린 뒤 약한 불에 찌듯 익혀 재벌구이를 했다. 그래서 한식은 손이 많이 가는 정성스러운 음식이다. 소금 대신 새우젓으로 간을 해 그 짭조름한 맛에서 한국의 바다가 절로 떠올랐다.

뚜껑이 달린 작은 옹기 모양의 그릇이 나온 것도 눈길을 끌었다. 발라낸 갈비뼈를 담는 그릇이었다. “입에서 나온 건 숨겨야 하죠.” 함께 나온 백김치는 둥그렇게 판 배 속에 말아 넣었다. 맛도 맛이거니와 그 모양새가 정갈했다. 외국인들에게는 맵지 않은 백김치를 내놓아야 하냐고 묻자 조 회장은 “우리가 먹는 다양한 김치를 일단 해외로 내보내 각국 현지 반응에 맞춰 매운맛을 조절하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한식도 서로 경쟁해야 발전한다”

마지막 식사로는 울릉도에서만 난다는 전호나물을 비롯해 냉이와 유채 등 10가지 나물을 얹은 ‘봄나물 비빔밥과 쑥 토장국’이 나왔다. 입 속을 화사하게 정리해 주는 느낌! 밥을 비빌 때 넣는 더덕 고추장 양념도 돋보였다. 고추장에 넣어 장아찌로 만든 더덕을 다져 다시 고추장에 넣고 생 더덕 즙을 넣어 만든 것이다.

늘 이렇게 진수성찬을 차려 먹느냐고 묻자 조 회장은 “그럼 배불뚝이 뚱보가 되게요?”라며 웃었다. 이렇게 손님을 초대해 정찬을 하면 다음날 아침과 저녁식사로는 미숫가루로 만든 빵과 견과류만 먹고 동대문 지하철역에서 성북동 집까지 일부러 걷는다고 했다.

후식인 떡과 오미자차를 거쳐 맨 마지막에 나온 식후주는 이날 저녁식사의 ‘화룡점정’이었다. 연갈색을 띄는 금빛, 강한 독주의 향기가 위스키 같았다. ‘광주요가 언제 위스키를 만들었지?’ 의아해하는데, 조 회장이 말한다. “무슨 술 같아요?” 애석하게도 답을 맞힌 손님은 없었다.

“작은 오크통을 구해 41도 화요를 장기간 숙성시켜봤어요. 그랬더니 명품 위스키 못지않은 풍부한 향과 맛이 납디다. 그래서 이번에 오크통 200개를 더 들여왔어요. 9월부터 오크통 소주를 제품으로 만들어 내놓으려고요.”

이런 영업 비밀을 신문에 소개해도 되냐고 묻자 그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쓰세요. 누가 먼저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경쟁이 발전을 이룹니다. 그래야 우리 음식, 우리 술이 거듭나지 않겠어요?”

따뜻한 뱃속만큼 마음도 불러왔다. 조 회장은 전국 팔도의 음식을 담는 8가지 한식 코스 요리도 계절별로 개발하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하면 한식에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담을 수 있다며…. 대문까지 나와 마중하는 그를 보면서 언젠가 국내에 ‘가온’을 다시 열겠다는 그의 바람이 꼭 이뤄졌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우정렬 기자 passion@donga.com
디자인=김원중 기자 paranwon@donga.com


▼광주요 2세 경영인… 고급 한식점 1호 열어▼


조태권 광주요 그룹 회장은 부친인 고 조소수 씨가 1963년 창업한 광주요를 물려받은 2세 경영인이다. 경남 남해에서 6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경기중학교 2학년 때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1973년 미국 미주리대(공업경영학)를 졸업한 그는 한국과 일본, 미국 생활을 두루 경험한 코스모폴리탄이다.

대학 졸업 뒤 일본의 종합상사인 마루이치에서 근무했다. 이후 ㈜대우에서 김우중 대우 회장의 측근으로 방위산업 업무를 맡기도 했고, 1982년엔 대우의 그리스 지사장을 지냈다. 1988년 부친이 세상을 뜨자 광주요에 인생을 걸었다. 도공들을 데리고 각국을 돌며 도자기 공부를 해 푸른색과 붉은색을 함께 띠는 상감 도자기를 개발했다.

2003년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연 고급 한식전문점 ‘가온’ 1호점은 한식 고급화의 신호탄이었다. 중동의 두바이 왕자가 홍삼과 닭, 전복 등을 넣어 만든 가온의 ‘홍계탕’(그릇당 30만 원)에 반해 귀국길 자가용 비행기로 540만 원어치나 배달시켰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하지만 고급 한식의 길은 멀었다. 가온은 계속 적자를 내다 2008년 12월 폐업했다.

최고의 그릇에 최고의 음식과 술을 올리겠다는 그의 집념은 2005년에는 전통 증류식 소주 화요의 개발로 이어졌다. 이 술은 2007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국제주류박람회(IWSC)에서 동상을 받았다. 41도, 25도, 17도 세 종류로 출시된 화요는 올해 스위스 다보스포럼 만찬 테이블에 칵테일 형태로 오르기도 했다.

2006년에는 가온을 중국 베이징에 열어 한식의 전진기지를 자처했다. 국내에선 포항에 ‘낙낙’을, 서울 압구정동 갤러리아백화점에 ‘녹녹’을 잇달아 열었다. 최근 서울시홍보대사로 선임된 재미교포 스타 셰프 ‘코리 리’의 이름을 딴 ‘코리 리 라인’ 식기도 6월 선보일 예정이다. 근래에는 한식 세계화를 앞당길 지혜와 경험을 나누기 위한 외부 강연까지 다니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