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집마다 부뚜막에선 왱병이 울고 야야, 주꾸미/배가 들었구나, 할머니 쩝쩝 입맛을 다신다/빙초산 맛이 입에 들척지근하고 새콤한 것이/달기가 햇뻐꾸기 소리 같다//아버지 주꾸미 한 뭇을 사오셨다 어머니 고추장/된장을 버무려 또 부뚜막의 왱병을 기울이신다//…환장한 환장할 봄날이었다./집집마다 부뚜막에선 왱병이 오도방정을 떨고’
<송수권의 ‘봄날-주꾸미회’에서> 왱병은 시큼한 식초병(촛병)이다. 작은 옹기단지이다. 남도에선 어느 집이나 부뚜막 혹은 부엌살강 어디쯤에 왱병이 있었다. 모가지가 좁고 잘록하다. 몸통은 배가 부를 대로 불러 달처럼 둥글다. 몸통 양쪽엔 사람 귀처럼 손잡이가 달려 있기도 하고, 손잡이 없이 귀때만 있는 것도 있다. 귀때는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있다.
왱병 표면은 늘 검댕으로 얼룩졌다. 수십 년 동안 부뚜막 먼지가 켜켜로 쌓여, 아예 굳은살로 박혀 있었다. 할머니 때부터 내려온 흔적인지도 몰랐다. 아니 그 위 할머니의 어머니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할머니도, 어머니도 왱병을 깨끗이 닦을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왱병 속엔 그 집안만의 독특한 식초가 들어 있었다. 매실식초 감식초 솔식초 사과식초 현미식초 보리식초 마늘식초 버섯식초 꿀벌식초 막걸리식초…. 식초는 쓰고 또 써도 샘물처럼 마르지 않았다. 식초의 눈, 즉 초산균이 살아있어 다시 재료만 넣으면 식초가 됐다. 보통 앵병 주둥이는 솔잎을 묶어 막았다.
왱병 속의 식초는 약방의 감초였다. 모든 음식에 서너 방울, 반 숟가락 때로는 은근슬쩍 넣는 둥 마는 둥 해도 맛이 기가 막히게 살아났다. 도라지 오이 머위 씀바귀의 쓴맛도 식초 두세 방울이면 쌉싸래 새콤한 맛으로 우러났다. 꽁치 고등어 비린내도 식초 한두 방울 떨어뜨리면 감쪽같이 사라졌다. 묵은 쌀도 왱병의 식초 몇 방울 넣어 씻으면 냄새가 없어졌다. 짜거나 매운 음식에 식초 몇 방울 넣으면 그 맛이 순해졌다. 식초는 신비롭다. 마술사다. 뭐든 식초 몇 방울만 들어가면 감미롭게 변한다. 거의 ‘한식의 감초’라고 할 수 있다. 냉면엔 반드시 식초 몇 방울이 들어가야 새콤한 맛이 난다. 목이 탈 때 물에 식초 몇 방울 타서 마시면 갈증이 씻은 듯이 가신다. 지겹게 계속되던 딸꾹질도 식초 한 숟가락 마시면 뚝 그친다. 농약 묻은 과일이나 채소도 식초 탄 물에 5∼10분 담가두면 그만이다.
식초는 신맛이다. 산성이다. 하지만 일단 몸 안에 들어가 분해되면 알칼리로 바뀐다. 신맛은 침샘을 자극해 침을 나오게 한다. 자연히 입맛을 돋운다. 위액 분비를 촉진한다. 신맛은 간을 튼튼하게 한다. 근육을 강하게 한다.
“난 올 여든여덟(1922년생)이지만 피부나이는 마흔 아홉(병원 진단)이다. 안경도 쓰지 않는다. 검버섯이나 주름도 거의 없다. 머리카락도 앞쪽만 희끗하다. 난 특별히 하는 운동이 없다. 30년 동안 하루 3번, 식후에 소주 한 잔 분량의 식초(식초:물=1:1∼1:3)를 마셨을 뿐이다. 식초를 마시기 전엔 워낙 술을 좋아해 위궤양과 만성위염을 달고 살았다. 1980년 식초를 석 달쯤 먹었더니 위장병과 만성피로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술을 마셔도 숙취 없이 거뜬히 일어났다. 늘 건강한 ‘소시지 변’을 보게 됐다. 물론 그 이후 단 한 번도 병원 신세를 진 적이 없다.” <박승복 샘표식품 회장>
김치도 미친다. 남도에선 김치가 설익어 쓴맛이 나면 ‘김치가 미쳤다’라고 말한다. ‘왱병이 운다’는 말도 있다. 부뚜막 왱병의 식초가 농익었다는 말이다. 시큼하고 새콤한 맛. 들큼하고 혀에 착착 감기는 맛. 입안 천장에 쩍쩍 달라붙는 맛….
식초는 영어로 ‘비니거(Vinegar)’이다. ‘와인(Vin)’과 ‘시다(Aigre)’의 뜻을 가진 두 말이 합해진 것이다. 그렇다. 술이 시어지면 식초가 된다. 막걸리를 왱병에 담아 부뚜막에 놓아두면 저절로 식초가 된다. 막걸리식초는 여수 서대회무침의 기본이다. 혀를 살살 녹인다. 여기엔 막걸리식초로 만든 초고추장에 그 비밀이 있다. 그것으로 무채처럼 가늘게 썬 서대와 다진 마늘 상추 부추 양파 무 오이 치커리 깻잎 미나리 쑥갓 배 당근 등 각종 야채를 버무린 것이 서대회무침이다.
목포 바지락무침도 마찬가지다. 바지락에 배 오이 양파 참나물 등의 온갖 야채를 양념장으로 무쳐낸다. 하지만 여기에 막걸리식초가 빠지면 은근한 감칠맛이 나지 않는다. 서해안 주꾸미나 준치회무침 꽃게무침 등도 막걸리식초가 들어가지 않으면 허전하다.
막걸리식초는 살균막걸리로는 만들 수 없다. 초산균이 살아있는 생막걸리를 써야 한다. 생막걸리를 목이 잘록한 옹기단지에 담아두고 숨 쉴 수 있게 뚜껑을 솔잎이나 한지 등으로 막아두면 된다. 2주 정도면 바닥에 희뿌연 것들이 가라앉고, 윗부분은 맑아진다. 가끔 위에 생긴 얇은 초막을 걷어내야 한다. 서너 달 되면 위의 맑은 부분이 거의 식초가 된다. 그걸 따라서 놓아두면 더욱 농익은 식초가 된다.
한번 만들어진 막걸리식초통은 떨어질 때쯤 생막걸리를 부어놓고 기다리면 저절로 식초가 된다. 요구르트 만드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마시는 양조식초’가 유행이다. 술꾼들조차 소주에 홍초를 타먹는다. 식품회사마다 앞 다퉈 새 상품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반드시 식후에 마셔야 한다. 위궤양이나 위산과다인 사람은 마시지 않는 게 좋다.
감식초 현미식초 막걸리식초 등 양조식초는 맛이 깊고 그윽하다. 입안에 척척 감긴다. 어느 음식이든 모두 넉넉하게 품는다. 어우러지지만 티를 내지 않는다. 화학식초인 빙초산은 톡 쏜다. 사납다. 살기가 있다. 요즘 남도 부뚜막엔 왱병 있는 집이 거의 없다. 왱병은 도시아파트 꽃병으로나 쓴다. 할머니 어머니 손맛도 사라졌다. 거리엔 빙초산처럼 톡 쏘는 사람만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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