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장에는 젊은이들 외에 모처럼 중년도 많았다. 외국인도 꽤 눈에 띄었다. 3월 31일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밥 딜런의 내한공연은 신구(新舊)세대와 동서(東西)가 동행한 관객층에서 이미 그가 서구 대중음악의 위대한 신화임을 확인해주었다. 나이 일흔에도 활발한 앨범과 공연활동을 하는 인물인 만큼 과연 그가 근래 음악에 중심을 둘지, 아니면 주로 과거의 골든 레퍼토리를 들려줄지 궁금했다.
밥 딜런은 이 점에서부터 관객들을 즐겁게 했다. ‘과연 이 곡을 할까?’ 싶었던 전설적인 명곡들이 줄줄이 흘러나왔다. 놀랍게도 차트 히트곡 ‘레이니 데이 우먼 #12 & 35’ ‘레이 레이디 레이’로 시작했고 ‘저스트 라이크 어 우먼’과 ‘발라드 오브 어 신 맨’을 노래한 순간 객석은 “이 곡도 듣게 되는구나!” 하는 감격과 환호로 가득했다.
한 조사에서 소설 영화 연극 음악을 망라해 20세기 서구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품으로 꼽힌 ‘라이크 어 롤링 스톤’이 앙코르 순서에서 나오자 흥분한 관객들은 떼 지어 무대 앞으로 몰려나갔다. 밥 딜런은 1960년대 청춘들과 교감하며 그를 전 세계 ‘저항의 기수’로 부상시켜준 곡 ‘블로잉 인 더 윈드’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배려를 보였다. 연주곡 리스트가 대표작 모음집이나 명작 컬렉션 수준이었다.
고령이어선지 처음 네 곡까지는 목소리가 갈라졌지만 곧바로 특유의 정돈된 야성(野性)을 회복했다. 그는 결코 추억과 향수를 자극하는 식으로 공연에 임하지 않았다. 한창 젊었을 때 불렀던 원곡을 애써 재현하기보다는 지금 나이에 맞춰 즉흥의 늘어진 장단으로 풀어갔다. 산울림의 김창완은 “할아버지 공연의 진수”라고 말했다. 한참이 지나야 어떤 곡인지 알 수 있었기에 쾌감은 덜했지만 그것은 또 다른 해석의 묘미였다. 그는 공연에서도 ‘창작 중’이었다.
전체적으로는 객석 맞춤용이 아닌, 빙 둘러서 그냥 세션맨들과 즐겁게 한판 벌이는 잼(Jam)에 가까웠다. 그는 기타와 오르간을 연주했고 하모니카도 불었다. 음악 스타일은 최근 그가 천착한 블루스 분위기가 압도하는 가운데 컨트리, 포크, 재즈 그리고 로큰롤의 느낌이 혼재했다. 이 음악들은 흔히 미국음악의 뿌리로 통한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이 단순한 포크영웅이 아니라 미국 대중음악의 정체성을 탐구하고 구현하는 아티스트임을 전했다.
오로지 음악밖에 없었다. 밥 딜런이 노래말고 입을 뗀 순간은 마지막 밴드멤버를 소개할 때뿐이었다. 대형화면이 설치되지 않아 무대에서 멀리 떨어진 관객들은 잘 보이지 않은 게 흠이었지만 음악으로, 진정한 음악으로 모든 것을 커버했다. 음악이 과연 무엇인지, 수요자들에게 무엇을 제공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 공연이었다. 음악이 이렇게 커 보인 공연은 지금까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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