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예술위원회(문예위)가 문예진흥원 시절을 포함해 34년간의 동숭동 시대를 마감하고 5일 구로동 시대의 막을 열었다. 9일 들른 신도림역 부근 구로동 새 문예위 청사는 아직 이삿짐이 드나드는 분주한 모습이었지만 직원들의 표정은 모처럼의 따뜻한 햇살처럼 밝았다.
잠시 외부 행사로 자리를 비운 오광수 위원장도 기자와의 통화에서 “수도권 서남부를 새로운 문화예술의 메카로 만들기 위해 구로에 왔다”며 “여기서는 좋은 일만 생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오 위원장이 ‘좋은 일만’이라고 강조한 이유는 동숭동 시대에는 좋지 않은 일이 많았다는 뜻이다.
문예위는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특정 이념에 따른 ‘코드 지원’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으며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에는 다시 문화계 이념 갈등의 진원지로 비쳤다. 급기야 2008년 문화체육관광부에 의해 해임됐다가 1월 말 법원에서 해임처분 집행정지 결정을 받은 김정헌 전 위원장이 2월 1일 출근을 강행해 ‘한 지붕 두 기관장’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지난달 19일 법원이 1심 결정을 취소해 이 사태가 일단락됐지만, 본질적으로 비정치적이어야 할 문예위가 그만큼 상처를 입은 셈이다.
문예위는 유럽 각국에서 제2차 세계대전 무렵 생겨난 ‘예술위원회(Arts Council)’가 모델이다. 민주국가의 예술위원회가 지켜야 할 약속으로,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원칙은 바로 ‘팔 거리 원칙(Arm's length principle)’이다. 문화예술을 지원하는 정부나 민간 후원자와도, 지원 대상인 문화예술인 및 단체와도 적정 거리를 유지하고 객관적인 검증을 거쳐 지원하되 일절 간섭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문예위는 이런 원칙에 따라 지원 심의의 책임성을 높이기 위해 8개 분야에서 책임심의위원 제도를 시범 도입했다. 지원 대상에 대한 선택과 집중, 예술전용공간 지원을 비롯한 간접지원, 창작품의 결과에 따라 공연예술창작기금을 지원하는 사후지원, 소외계층 문화역량을 높이는 ‘생활 속의 예술 활성화’ 등 4가지를 지원 원칙으로 실행해 왔다. 이 부문의 예산도 2009년 342억 원에서 올해 520억 원으로 늘렸다.
경영효율화도 강도 높게 도모했다. 지난해 22개 간부 보직을 16개로 줄이고 126명이던 직원도 111명으로 줄였다. 대졸 초임 연봉도 20% 가까이 줄였다. 올해에는 직원을 91명으로 축소할 계획이다. 대학로 아르코 예술극장과 아르코 예술정보관도 독립기관으로 분리시키면서 몸집을 줄였다. 뉴서울골프장도 올해 매각할 예정이다.
문예위의 올해 예산은 990억 원으로 이 중 890여억 원을 지원 사업에 쓴다. 이 돈은 문예진흥기금 적립금과 이자, 로또복권기금, 기부금 등으로 공적 재원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돈을 쓰는 문예위가 지원 원칙을 거듭 다지고 경영을 효율화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문예위가 새 둥지에서 이념 갈등을 비롯한 비생산적인 논란에 휘말리지 않고 ‘문화예술의 촉진자’ 역할을 흔들림 없이 수행하기 바란다. 그것이 필생의 역작을 위해 예술혼을 불태우는 문화예술인을 진정으로 ‘지원’하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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