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누구!’ 하고 단번에 주인을 알려주는 별명들이 있다. 그런 별명은 잘 그린 캐리커처처럼 빠르게 전파되고 오래 살아남는다. 반면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하는 별명들은 초기에 반짝하더라도 서서히 생명을 잃는다. 장수하는 별명과 조로하는 별명의 차이는 어디서 비롯될까?
프로기사의 별명 짓기에도 하책과 상책이 있다. 단순히 이름을 본떠 별명을 지을 때 어색한 경우가 많다. 반상의 대조영(안조영 9단), 반상의 등반가(허영호 7단)가 그런 경우다. 이름 말고는 뚜렷한 연관을 찾을 수 없다. 대조영보다는 ‘반집의 제왕’이 훨씬 어울리고 동명의 산악인보다는 차라리 ‘꽃미남’이 낫다.
프로기사 중에 깡통과 베컴이 숨어 있다는 걸 아시는지. 절친한 동료들이 강동윤 9단과 백홍석 7단을 편하게 부를 때의 애칭이다. 나름의 재미가 있을진 몰라도 이름에서만 별명을 따오는 것은 말장난에 그치기 쉽고 널리 확산되기도 어렵다.
외모나 인상으로 별명을 만들기도 하는데 그 수가 제법 많다. 어린왕자(박영훈 9단), 피노키오(김만수 7단), 흑기사(김승준 9단), 박찬호(윤현석 9단), 록키(이영구 7단), 영감(김기용 5단) 등이 대표적 사례. 실제 모습을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경우가 많아 별명 짓기의 중책 정도 된다. 하지만 언제까지 어린왕자나 피노키오로 남을 수는 없기에 이런 별명들은 언젠가는 떼내야 하는 계급장 같은 운명에 처하기 쉽다. 박영훈 9단은 ‘황태자’라는 새 별명을 얻으며 위기를 타개했고 김기용 5단은 애초부터 유효기간이 넉넉한 별명을 가졌지만 다른 기사들은 좀 더 연륜 있는 별명을 조바심치며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바둑 기사의 별명으로 상책은 역시 기풍과 연관 짓는 것이다. 전성기 일본 바둑을 풍미했던 대가들이 그렇다. 면도날 사카다, 괴물 슈코, 미학자 오다케, 컴퓨터 이시다, 이중허리 린하이펑, 우주류 다케미야, 대마킬러 가토, 폭파전문가 조치훈…. 기풍은 물론 기사의 성품까지 연상케 하는 별명들이어서 지금 봐도 근사한 느낌이다.
우리에게도 기풍과 연관된 별명들이 적지 않다. 신산-돌부처(이창호 9단), 세계최고의 공격수-일지매(유창혁 9단), 제비-전신(戰神·조훈현 9단), 된장바둑-야전사령관(서봉수 9단)이 있고 속기와 변신술의 달인 손오공(서능욱 9단)과 영환도사(김영환 9단)가 있다. 젊은 기사로는 결정적 한 방으로 유명한 원펀치가 있고 강렬한 기풍과 이름을 결합한 쎈돌이 있다. 이런 별명들은 희소가치가 있어 만들어 내기도 쉽지 않다.
한편 기풍과 연관시켰지만 최악이 된 별명도 있다. 공격바둑에 능했던 박지은 9단을 ‘여자 유창혁’이라 불렀던 때가 있다. 생각해 보면 당사자는 굉장히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나는 박지은이다. 내가 왜 유창혁이냐”라는 항변이 나올 법하다. 똑같이 뒤집어서 유 9단을 ‘남자 박지은’이라 부른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주인을 살리기도 하고 해치기도 하는 것이 별명이다. 반짝이는 별명만이 회자되며 오래도록 팬들 곁에 머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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