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일/푸드]“와인은 자연이 만드는 것… 잘익은 포도나무 가지도 함께 넣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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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4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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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와인 애호가, 관광객들이 굳게 닫힌 빨간색 철창 대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흡족해한 뒤 돌아선다. 그럴 만하다. 그 철창 대문 꼭대기에는 ‘RC’란 표시가 있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와인인 로마네콩티의 이니셜…. 이 와인을 국내 수입하는 신동와인의 ‘사전 협조’로 굳게 닫혔던 그 문이 스르르 열렸을 때,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소박한 파란색 파카 차림으로 그 문을 열어준 사람은 다름 아닌 ‘도멘 드 라 로마네콩티(DRC)’의 공동 소유자인 오베르 드 빌렌 사장(71)이었다. 지난달 프랑스 부르고뉴 본 로마네 마을에서 접한 ‘부르고뉴의 전설’ 로마네콩티 포도밭의 세계로 당신을 초대한다.》

로마네콩티 제조사 佛DRC 와이너리를 가다

○ 섬세한 와인 맛은 자연의 몫


빌렌 사장은 업무용 승용차인 은색 ‘라구나’에 기자를 태워 포도밭부터 갔다. DRC에선 6개의 본 로마네 그랑 크뤼 와인을 만든다. 로마네콩티, 라 타슈, 리쉬부르, 로마네 생 비방, 그랑 에세조, 에세조…. 각 와인을 만드는 포도밭은 반듯하게 구획이 나뉘어 있는데, 이 구획은 15세기부터 여태껏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토양 색상도 저마다 달랐다. 빌렌 사장은 “토양을 뒤집은 지 오래된 포도밭은 색이 좀 어둡다”고 설명했다.

3월은 마지막으로 가지를 치고 거름을 주는 시기. 부르고뉴에선 “이른 가지치기든 늦은 가지치기든 3월의 가지치기만 한 것이 없다”는 격언이 있다. DRC 포도밭의 포도나무들은 그루터기가 아주 낮게 잘린 상태였다. 나무 가지 하나는 철사 줄을 따라 수평으로 고정해 지면에서 약 40cm 높이에서 휘어지게 만들었다. 이 동네에서 가장 흔한 귀요식 가지치기(19세기 중반 이 형태를 보급한 쥘 귀요 박사의 이름을 딴 방법)다. 거름은 외부에서 들여오지 않고 포도나무 가지를 잘게 부숴 뿌린다고 했다. 그래야 살아 있는 토양이 된다고. 찬찬히 들여다보니 그 흙에는 이름 모를 식물들이 함께 자라고 있었다.

비탈진 위쪽에 있는 라 타슈 포도밭을 가장 먼저 둘러본 후 아래쪽 로마네콩티 포도밭으로 이동했다. 2년 전 만났던 보르도 샤토 라피트 로칠드의 크리스토퍼 살랑 사장이 바이오다이내믹 농법을 은근히 무시했던 게 문득 생각났다. 별과 달의 주기에 맞춰 포도를 재배하고 수확하는 이 농법에 대해 당시 살랑 사장은 “흥미롭긴 하지만 한계가 있다. 포도나무에 서식하는 벌레를 잡지 않아 귀한 포도나무를 망치고 싶지 않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빌렌 사장은 달랐다.

“만약 내게 15년 전 물었다면 나 역시 살랑 사장과 같은 답을 했을지 모릅니다. 그땐 잘 몰랐거든요. 와인의 섬세한 맛은 결국 자연의 몫이라는 걸. 그래서 요즘엔 별과 달의 운행을 유심히 살펴 미생물이 활성화되는 시기엔 절대로 와인을 병에 담지 않습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잘 익었으면 포도알과 가지를 함께 넣어 와인을 만들죠.”

‘부르고뉴의 신’으로 불렸던 고 앙리 자이에 씨의 조카인 에마뉘엘 루제 씨, 태어난 지 15분 뒤 와인에 입술을 댔다는 일화가 있는 랄루 비즈 르루아 여사 등 다른 부르고뉴의 유명 양조가들도 이 바이오다이내믹 농법에 푹 빠져 있다. 물 흐르듯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이 친환경 경작법은 어쩌면 부르고뉴의 평화로운 마을 풍경과도 닮았다. 몇 년 전 세상을 뜬 앙리 자이에 씨의 소박한 집은 그가 떠났어도 여전히 그의 이름을 새긴 조그만 문패를 달고 있었다. 앞마당에 심어진 포도나무들도 예전 그대로다. 늙은 포도나무에서 기쁨의 ‘눈물’인 새 수액이 올라오듯 생명에 대한 관조가 흐르는 곳. 그래서 이곳에서 태어난 부르고뉴 와인은 다소 고집스러울 수는 있어도 우아한 기품을 품고 있는 것이다.

○ 꿈의 저장고에서 맛본 ‘신의 물방울’


빌렌 사장이 이끈 DRC의 지하 와인 셀러는 ‘꿈의 저장고’였다. 각 와인 오크통을 빈티지당 200개 이상씩 저장해 수십만 개의 오크통이 쌓여 있었다. 얼마나 자주 이곳에 들르냐고 묻자 그는 말했다. “고요하게 명상하고 싶을 때. 시간이 멈춰선 공간이거든요.”

DRC의 6개 와인 중 특히나 마음이 가는 와인이 있냐고 묻자 골똘히 생각하더니 “다들 내 자식이다. 그런데 로마네 생 비방은 유별나게 기르기 힘든 자식이었다”고 했다. 1960년대 이 밭을 사 들여 좋은 토양으로 바꾸기 위해 부단한 관심과 정성을 쏟았다는 것이다. 그때 그의 표정은 정말로 자식을 염려하는 아버지의 표정 그대로였다.

그가 시음할 와인을 가져왔다. “당신처럼 매우 여성적인 와인이에요”라며. 아, 라 타슈 2006년 빈티지! 빌렌 사장의 말처럼 시간이 이곳에서 멈췄으면 했다. DRC는 연간 6000병 밖에 생산하지 않는 로마네콩티 한 병에 라 타슈 3병, 리쉬부르·로마네생비방·그랑에세조·에세조 각 2병씩 모두 12병을 한 세트(약 3000만 원)로 판다. 물량이 달려 나라별 공급량도 할당해 국내에선 유명 대기업 회장들도 손에 얻기 힘들다. 그 와인을 DRC 지하 셀러에서 맛보게 되다니….

라 타슈에 대해 기존에 갖고 있던 이미지는 루비 목걸이를 한 여성이었다. 매혹적인 장밋빛의 이 와인은 영화 ‘도쿄타워’에서 세련된 유부녀 여주인공이 친구 아들과 마주 앉아 마신 술이기도 하다. 고급스러우면서도 복잡한 감정 선을 지닌 와인이랄까.

일본 작가 무라카미 류는 ‘와인 한 잔의 진실’이란 단편집에서 이 와인에 대해 이렇게 쓰기도 했다. ‘라 타슈는 복잡한 향기와 혀의 감촉과 맛을 가지고 있었다. 향기에 취해 있으면 혀의 감촉에 배신당하고 혀의 감촉에 취해 있으면 맛에 배신당하고, 맛에 취하면 다시 향기가 다른 쾌락을 전해주는 것이었다.’ 천천히 와인 잔에 입을 댔다. 과일, 박하, 감초향이 어우러졌다. 그러나 빌렌 사장은 “아직 (이 와인은) 화가 났어요”라며 안타까워했다. “너무 가능성 있는 와인을 너무 빨리 따고 말았어요. 이 와인은 20년 후에 진가를 발휘할 텐데 말이죠.” 사실 DRC의 2006년 빈티지는 테루아르가 탁월한 해로 꼽히지만, 병에 와인을 넣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병과 와인이 동거하는 기간이 아직 짧았다는 설명이었다.

절친한 와인 칼럼니스트는 DRC의 셀러에서 로마네콩티를 맛보지 못하고 온 내게 “오크통에 담겨 있던 한 방울이라도 마셔봤어야 했다”고 핀잔을 줬다. 그러나 주인이 내놓지 않는 와인을 청하는 건 왠지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 같았다. 와인은 결국 지극히 사적인 경험이며 하늘이 맺어주는 인연 아닐까. 20년 후 어엿한 아가씨가 돼 있을 딸과 함께 라 타슈 2006년 빈티지를 구해 마시려 한다. “옛날에 엄마가 DRC 셀러에서 말이지…”라며 한참 동안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을 것 같다. 그때쯤이면 라 타슈도 치기 어린 화가 풀려 있겠지.

본 로마네=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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