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의 비인 명성황후(1851∼1895), 청나라 함풍제의 후궁으로 입궁해 훗날 태후가 된 서태후(1835∼1908), 일본 메이지 왕과 결혼한 하루코 왕비(1849∼1914). 저자가 이 책의 주인공으로 내세운 한국, 중국, 일본의 ‘황후’들이다.
부경대 사학과 교수로 조선 왕실문화와 역사 속 여성들을 연구해 온 저자는 어느 날 이 세 명의 여성을 놓고 ‘19세기 동북아 3국의 역사를 황후의 시각에서 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세 사람의 운명은 조국의 운명을 닮았다. 격변의 시기였던 19세기 말, 명성황후와 서태후는 적극 국정에 개입하다가 각각 조선, 청나라와 운명을 함께했고 하루코 왕비는 일왕을 거들어 일본의 근대화에 동참했다.
세 사람 가운데 가장 적극적으로 나라의 운명을 좌우했던 사람은 서태후였다. 18세에 함풍제의 후궁으로 입궁해 10년을 지낸 그는 이후 47년간 태후의 위치에서 수렴청정으로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
서태후의 위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광서제의 아버지인 순친왕의 행동에서 잘 드러난다. 서태후를 두려워 한 그는 광서제가 커서 친정(親政·왕이 직접 국정을 돌봄)을 하더라도 절대 권력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서태후에게 맹세했다. 혹시라도 의심을 살 일을 피하려고 자신이 사는 집을 ‘늘 겸손함을 생각한다’는 뜻의 사겸당(思謙堂)으로 불렀다.
서태후는 1889년 쯔진청(紫禁城)을 떠나 이허위안(이和園)으로 물러감으로써 겉으로는 권좌에서 멀어졌다. 그러나 조카딸인 황후와 심복 환관인 이연영을 통해 황제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영향력을 유지했다. 이 와중에 신하들은 ‘태후당’과 ‘황제당’으로 갈렸고 나라 바깥에선 일본의 힘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청나라는 안팎으로 위기에 몰렸지만 이허위안에 있는 서태후는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다.
고종과 결혼한 명성황후 민씨는 서태후처럼 드러내놓지는 않았지만 고종을 내조하는 형식으로 국정에 개입했다. 저자는 “조선시대 국왕은 바깥일을 내전에 갖고 들어가는 게 금기시됐지만 고종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썼다. 혼자 풀기 어려운 문제를 갖고 가 왕비의 의견을 구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민씨는 고종보다 상황 판단력과 결단력이 뛰어났고, 옳고 그른 것을 밝혀내는 데 과단성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밤에 이뤄지는 고종과 왕비의 국정 논의는 점점 깊이를 더했고 민씨의 내조 범위도 자연히 넓어졌다. 더 나아가 민씨는 흥선대원군과 맞서고 궐 밖의 사람들을 더 적극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친정 식구를 대거 권력세계로 끌어들였다.
민씨 집안이 지나치게 권력에 개입함으로써 권력집단 내에서 크고 작은 충돌이 벌어졌고 임오군란을 비롯한 사회적 혼란이 빚어졌다. 민씨는 혼란의 와중에 외세로부터 조선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1895년 10월 8일 경복궁에서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됐다. 그 즈음 조선의 국운도 이미 기울어 있었다.
하루코 왕비의 삶은 메이지유신과 궤를 같이했다. 메이지유신을 통해 왕이 막부를 누르고 권위를 찾자 왕비의 권위도 높아졌다. 하루코 왕비는 이전의 왕비들과 달리 어소(御所·왕이 거처하는 곳)에서 일하는 여자 관리들을 직접 뽑고 관리했다. 어소의 여자 관리들은 유력한 집안의 딸들로 이전까지는 특별한 위계질서가 없었으며 왕비들도 강력한 권위를 행사하지 못하는 대상이었다.
그는 조용한 내조형이었지만 여성의 복장에 대해선 목소리를 높였다. 시대의 변화에 걸맞게 양장을 입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신까지 서양화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 부녀의 언행으로 귀감이 될 만한 글을 모은 ‘부녀감(婦女鑑)’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근대적인 양장과 전통적인 ‘부녀감’은 메이지유신의 주역들이 추구하던 시대정신과 맞아떨어졌다.
저자는 “이들의 삶이 역사적 의미를 갖는 이유는 그들의 삶이 근본적으로 19세기의 격동기와 대결해야만 했던 조선, 청나라, 일본의 역사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은 개인적인 삶이었을 뿐만 아니라 19세기 동북아 3국의 험난했던 역사 그 자체이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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