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상복합오피스빌딩 ‘부띠크 모나코’의 CPM을 맡은 ‘플래닝 코리아’의 이병주 대표. 그는“초현실주의 콘셉트로 기존 틀을 뛰어넘는 공간 설계가 30, 40대 고소득층의 기호와 맞아 떨어졌다”고 말했다. 오른쪽은 서울 서초구 서 초동에 있는 부띠크 모나코. 사진 제공 플래닝 코리아
《2005년 여름 서울 강남의 한 중식당에서 ‘건축물 콘셉트 설명회’라는 이색 행사가 열렸다. 400여 명의 초대 손님이 비공개로 참여했지만 ‘건축물 설계의 기본 개념을 예비 수요자에게 미리 알려 이해를 돕는다’는 독특한 취지가 화제를 모았다. 2009년 한국건축문화대상을 받은 주상복합 오피스빌딩 ‘부띠크 모나코’(서울 서초구 서초동)는 시작부터 이처럼 남달랐다. 2008년 완공된 이 건물은 30, 40대 고소득자들이 입주하면서 ‘강남역 인근의 문화 지형도를 바꿨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규모 프로젝트일수록 콘셉트 입안-설계-마케팅 전과정 꿰뚫고 조율하는 매니지먼트 중요성 커져”
이 건물은 두드러진 성과와 더불어 한 회사가 아이디어와 콘셉트 입안, 설계, 마케팅 등을 총괄한 종합 프로세스로 진행되면서 한국 건축계를 놀라게 했다. 이런 과정을 지휘한 이가 ‘플래닝 코리아’의 이병주 대표(52)다. 부띠크 모나코를 설계한 이는 조민석 매스스터디스 건축설계사무소 대표이지만 건물의 입지와 용도, 예상 입주자의 라이프스타일을 고려한 공간 배치와 마케팅 전략 등은 이 대표가 만들었다. 플래닝 코리아는 부띠크 모나코의 CPM(Creative Project Management)을 맡은 것이다.
이 대표는 25일까지 부띠크 모나코 지하 1층 뮤지엄에서 ‘부띠크 모나코’ 외에 그가 고안하고 기획한 20여 개 건축 및 도시 설계 프로젝트 콘셉트를 선보이는 전시를 연다. 그는 CPM의 의미로 말문을 열었다.
“건축이 글로벌 시장으로 확산되고, 소비자들의 수요도 다양해지면서 복잡한 건축 과정을 하나로 조율하는 매니지먼트 전문가의 역할이 커질 수밖에 없어요. 한 지역이나 국가를 대표하는 대규모 프로젝트일수록 CPM의 비중이 큽니다.”
부띠크 모나코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CPM의 성과로 탄생한 건물이다. 이 건물의 용지는 10년 가까이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뀌며 애물단지 취급을 받았다. 높은 땅값에 비해 효율이 애매한 데다 유흥가에 인접했기 때문이었다. 이 대표는 2004년 6월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누가 살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해 30, 40대 경영인이나 전문직을 대상으로 정한 뒤 공간 기본 개념의 틀로 ‘초현실주의 미술’을 내세웠다. 마그리트, 샤갈, 마티스 등 초현실주의 대가들에게서 개념을 찾아내 각 방을 꾸몄다. 172가구에 49가지의 서로 다른 형태를 가진 공간이 퍼즐처럼 얽힌 지상 27층, 지하 5층 건물. 방과 방을 잇는 작은 교각을 만들어 건물 외부를 바라볼 수 있게 하거나 개별 실내 정원을 두기도 했다.
“건물을 짓는 데 초현실주의라니. 처음에는 다들 마뜩잖아 했어요. 하지만 지금 이 시대의 경영인에게 무엇보다 시급하게 요구되는 가치는 혁신을 주도하는 과감성입니다. 부띠크 모나코의 초현실주의적 공간은 규격화된 사고에 전환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고 그것이 소비자들의 기호와 맞아떨어졌습니다.”
1980년 명지전문대 그래픽디자인과를 졸업한 이 대표는 광고업계에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해 패션브랜드 ‘해지스’, 아파트 브랜드 ‘파크뷰’ 등 여러 브랜드를 새로 만들거나 리뉴얼했다. 2000년 플래닝 코리아를 설립하고 2003년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복합문화공간 ‘네이처 포임’을 기획했다.
이번 콘셉트 전시에서 선보이는 것은 경기 수원시 ‘SK 비타민 셀 파크’ 프로젝트, 광주 ‘갤러리 303’ 등이다. 최근 계획을 마치고 시공에 들어가는 ‘SK 비타민 셀 파크’는 한국의 문화 종자와 생태구조 디자인을 콘셉트로 잡았다. 조선 정조가 관심을 기울였던 수원(화성)의 역사성을 반영하고 땅이 가진 생명 에너지를 상징하는 세포(cell)를 공간의 원형 단위로 정해 비선형적으로 원형 공간이 얽혀든 주거 공간을 제안했다.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친환경 시스템은 완공된 건물에 덧붙이는 게 아니라 시작부터 자연스럽게 건축물의 필수 요소가 됐다.
광주의 ‘갤러리 303’은 맞춤형 문화주거공간으로, 주부 최고경영자(CEO)나 전문직에 종사하는 여성을 주 고객으로 삼아 주거공간의 예술성에 초점을 맞췄다. 장윤규 국민대 교수 등이 부속 개별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이 대표는 특히 한국의 전통 문화를 건축 콘셉트로 풀어내 세계 건축가 디자이너에게 선보이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그는 “몇 초 만에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는 요즘은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해야 독창성을 인정받고 세계 시장에 팔 수 있다”며 “우리 문화와 예술이 세계와 겨룰 수 있는 콘셉트를 찾아내고 구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최근 조선의 왕이나 신윤복 같은 풍속화가 등 역사 속 실존 인물의 이미지를 공간 디자인 개념에 도입하고 있다. ‘신윤복풍’의 공간에는 아기자기한 예각을 사용하고 ‘정선풍’의 공간은 풍성한 입체감을 강조하는 식이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서울 ‘용산 IBD’ 프로젝트는 음양오행 이론을 바탕으로 생태 도시 개념을 전개했다. 제주도의 초고층 레지던스 ‘드림 타워’, 베트남 하노이 구도심 마스터플랜에도 이 대표만의 독특한 공간 개념이 녹아 있다.
“한국 사회에서 건축물은 ‘건축가가 설계하는 것’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당연한 공식이 더 풍부한 가능성에 제한이 될 수 있습니다. (디자이너로서) 제 역할은 건축가를 통해 일련의 의미 있는 스타일을 제안하고 현실화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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