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날 따스한 볕을 임 계신데 비추고자/봄미나리 살찐 맛을 임에게 드리고자/임이야 무엇이 없을까마는 내 못 잊어 하노라’ <청구영언 작자미상 시조에서>
미나리 살이 통통하게 올랐다. 줄기 속이 꽉 찼다. 날것을 한 입 깨물면, 아삭아삭 미나리 허리 부러지는 소리. 사각사각 사과 베어 먹는 소리. 상큼한 향기가 입안 가득 퍼진다. 겨우내 칼바람을 버텨낸 덕분인가. 뼛속까지 저미는 얼음물에서 다진 품격인가. 미나리는 야들야들 부드럽고 여리다. 하지만 생명력은 들풀처럼 억세고 끈질기다. 한겨울 뿌리에서 조금씩 싹을 틔우고, 봄볕에서 훌쩍 줄기를 키운다.
미나리는 꼿꼿하지 않다. 벼처럼 허리가 부실하다. 낭창낭창하다. 서로서로 몸을 기대어 겨우 버틴다. 키가 조금만 커져도 스르르 땅에 눕는다. 그렇지만 그냥 줄기를 뚝 분질러서 땅에 꽂아도 뿌리가 돋는다. 줄기 마디 부근에서 뿌리가 나온다.
미나리 꽃은 하얗다. 열매를 맺어 씨앗을 남긴다. 하지만 대부분 줄기번식으로 키운다. 미나리는 여러해살이풀이다. 밑동을 잘라도 남아있는 뿌리에서 다시 줄기가 우우우 올라온다. 또 잘라내도 자꾸자꾸 올라온다. 그래서 장다리는 한철이요, 미나리는 사철이다.
미나리는 물을 좋아한다. 축축한 습지가 보금자리다. 영어 이름(water parsley, water celery, water dropwort)에도 반드시 ‘물’이 들어간다. 미나리가 자라는 무논이 바로 미나리꽝이다. 미나리꽝은 대부분 동네 어귀 정자나무 빨래터 부근에 있다. 아낙네들은 그곳에서 빨래를 하며 수다를 떤다. 시커먼 빨래 땟물은 미나리꽝을 거쳐서 흘러나간다. 온갖 동네 허드렛물과 구정물도 미나리꽝에 모였다가 다른 곳으로 나간다. 그런 곳에서 미나리는 꿋꿋하게 잘도 큰다.
한겨울 미나리꽝이 꽝꽝 얼면 동네 조무래기들은 그곳에서 얼음을 탄다. 얼음장 밑으로 언뜻언뜻 푸른 미나리가 비친다. 간혹 얼음이 깨져 무릎까지 빠진다. 아이들은 한바탕 깔깔댄다. 물에 빠진 아이는 잠시 울상을 짓는다. 하지만 금세 돌아서서 바지의 물을 대충 짜내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얼음을 탄다. 아이들은 얼음장 밑에서 크는 파릇파릇한 미나리이다.
‘그러니까 미나리꽝은/탄생의 손길 같은 것이지//거머리와 뱀과/썩은 나무토막에 개똥까지/널려있던 진흙탕 속에서/새 생명을 건져 내다니/어머니의 손길, 그 아니냔 말이지’ <김종제의 ‘미나리꽝’에서>
미나리는 찬 알칼리음식이다. 열이 펄펄 나거나 타는 목마름에 그만이다. 술꾼들 숙취 해소에도 좋다. 간에 좋고 해독작용도 해준다. 바로 복어 요리에 미나리가 빠지지 않는 이유다. 봄철 황사에 독성을 중화해 주는 미나리가 안성맞춤이다. 비타민과 칼슘이 풍부하다. 도무지 입맛이 없을 때 식욕을 돋운다. 수분과 섬유질이 장벽을 자극하여 장의 활동을 돕는다. 변비 예방에 효과적이다.
미나리는 안 들어가는 곳이 거의 없다. 육회비빔밥엔 산뜻하고 상큼한 감칠맛을 내준다. 큼직한 놋그릇에 김 펄펄 나는 밥과 살짝 데친 미나리 숭숭 썰어 넣고, 고추장 참기름으로 쓱쓱 비벼 먹으면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다. 버섯전골 생선매운탕 해물찜 두부전골 생선찌개 등에선 비린내와 느끼한 맛을 가시게 한다. 미나리가 들어가는 순간 맛이 개운해진다.
미나리는 날로 먹는 것이 으뜸이다. 생미나리 우두둑 깨무는 맛이 최고다. 양철지붕에 싸락눈 내리는 소리가 난다. 뽀드득! 눈 즈려밟는 느낌이 아득하다. 홍어무침, 가오리무침, 서대무침, 주꾸미무침 등 온갖 무침에도 생미나리는 필수다. 막걸리식초와 버무리면 맛이 황홀하다. 삼겹살에 미나리를 돌돌 감아서 먹는 맛도 괜찮다. 데친 미나리를 소금으로 간을 맞춘 뒤 참기름으로 무쳐 먹어도 맛있다. 미나리잎쌈. 미나리물김치, 미나리김치, 미나리전, 미나리비빔밥, 미나리된장무침, 미나리잡채, 미나리생채, 미나리해물샐러드….
미나리는 짧고 줄기가 굵은 것이 맛이 달고 연하다. 미나리꽝 미나리는 길쭉하고 파랗다. 납작하게 땅에 엎드린 땅미나리가 맛있다. 도랑가의 붉고 오동통한 미나리는 좀 싱겁다. 보통 논미나리보다 밭미나리가 속이 차서 맛있다.
요즘엔 경북 청도 한재계곡에서 나는 한재미나리가 이름났다. 한재미나리는 봄에 단 한 번 수확한다. 줄기 끝이 유난히 붉고, 참나무처럼 속이 꽉 차 씹는 맛이 그만이다. 겨우내 비닐하우스에서 지하수로 키운다. 옛날엔 미나리꽝의 구정물로 키웠지만, 요즘 미나리는 지하수 등으로 키우는 곳이 대부분이다. 밤에 따뜻한 지하수를 대주고, 낮에 물 빼주는 것을 반복한다.
미나리강회는 옛날 궁중음식이다. 봄철 밥상차림 중 봄삼첩(흰밥, 무장국, 간장, 나박김치, 청포무침, 조기조림, 미나리강회)에 들어갈 정도로 중히 여겼다. 음력 사월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이 바로 미나리강회 먹는 날이다. 강회는 편육 제육 달걀지단 버섯 등의 재료를 끓는 물에 데친 미나리로 돌돌 감는다. 위 끝은 가위로 가지런히 자른 뒤 실백을 하나씩 박는다. 양쪽 끝부분이 새집처럼 삐죽삐죽 나오면 그만큼 맛이 떨어진다.
절집 미나리강회는 고기 대신 느타리버섯과 씨 뺀 대추 등을 쓴다. 부드럽고 향이 상큼하다. 궁중에선 족두리 모양으로 감고, 보통 서민 가정에선 상투 모양으로 감았다. 강회는 초고추장에 찍어 술안주나 반찬으로 먹었다. 막걸리나 포도주 소주 안주로도 그만이다. 미나리강회를 먹을 때마다, 미나리 다듬는 마음으로 한 생을 살아봤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게 참 어렵다.
‘미나리 파릇하게 데쳐/계란지단으로 띠를 두르고/나란히 접시에 오른 다음/초고추장으로 연지 찍어먹던/미나리강회//그날, 그대가/내 국그릇 앞으로/밀어 주었지요//이제/소홀한 작은 기억되어/사라진 일 되었나요?//오, 오늘 저녁/문득 생각나네요/미나리강회/푸릇한 그대의 이마.’ <정두리의 ‘미나리강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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