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자신을 고발하는 선인들의 자기소개서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4월 24일 03시 00분


◇나는 어떤 사람인가/심경호 지음/664쪽·2만8000원·이가서

영조의 업적평가, 이규보의 은둔일기 등
자부심-안타까움-자조 녹아든 인간미 생생

《“또한 80년 사업에 대해 묻는다면, 조정의 신하들의 당쟁을 막기 위해 탕평을 온 마음으로 추구한 사실과 붕당의 원인이 청선(淸選·적당한 물건이나 인물을 바르게 고름)을 다투는 데 있다고 보아 전랑(銓郞)의 통청(通淸·청백리의 자격을 얻는 일) 권한을 주관하지 못하게 하고…”》

조선의 박제가, 영조, 신라의 최치원, 고려의 이규보(왼쪽부터) 등은 자서전 속에서 스스로 업적을 평하기도 했고 뜻을 다 펼치지 
못했던 삶을 웃어넘기기도 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조선의 박제가, 영조, 신라의 최치원, 고려의 이규보(왼쪽부터) 등은 자서전 속에서 스스로 업적을 평하기도 했고 뜻을 다 펼치지 못했던 삶을 웃어넘기기도 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조선 후기 영조가 삶을 돌아보며 쓴 ‘어제자성옹자서(御製自省翁自敍)’의 한 대목이다. 영조는 이 글에서 일생을 돌아보며 스스로 업적을 평가했다. 또 “나의 밭에서 나는 것을 먹고 나의 샘에서 나는 물을 마시며 나의 책을 보고 나의 잠을 편안히 자며 나의 본분을 지키고 나의 연수를 즐기는 것이다. 아아, 오늘 이것을 실천할 수 있을지 없을지?”라며 개인적 소망을 밝히기도 했다.

우리 선인들은 산문과 시를 통해 일생을 돌아보는 자서전을 남겼다. 책에는 이 같은 자서전을 모아 싣고 해설을 덧붙였다. 조상들의 자아성찰을 엿볼 수 있는 기회다.

“백운거사(白雲居士)는 선생의 자호다. 이름을 숨기고 호를 드러낸 것이다.”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는 자서전 ‘백운거사전(白雲居士傳)’에서 자신을 숨겼다. 근대 서양의 자서전과 달리 화자와 주인공이 동일인물이라는 점을 밝히지도 않았다. 그는 “집에는 자주 식량이 떨어져서 끼니를 잇지 못했으나 거사는 스스로 유쾌히 지냈다”며 구름처럼 자유로웠던 삶을 돌아본다.

허구가 개입한 소설 형식으로 삶을 돌아보는 경우도 있다. 조선 후기의 학자 이익이 남긴 ‘동방일사전(東方一士傳)’은 중국 시인 도연명의 시 ‘의고(擬古)’ 중 제5수를 차용했다. 도연명이 ‘동방의 이름 없는 선비’를 만나러 와서 시를 나누며 교유했다는 내용이다.

“무릇 선비가 천하에 태어나, 시절을 만나는 것이 불행하여 사람을 피하고 세상을 피하여 새 짐승과 더불어 한 무리를 이루어서는 매몰되어 세상에서 일컬어지지 못하는 자가 한두 명에 그치겠는가?”라고 쓴 대목에서 주류학파에 비판적이었던 이익의 삶이 드러난다.

당시에는 시간 순으로 서술하기보다 삶의 한 측면을 부각시킨 짧은 글을 주로 남겼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덕무의 ‘간서치전(看書痴傳)’이 대표적이다. ‘책만 보는 바보’라는 뜻으로 스스로 지은 호 ‘간서치’에서 딴 제목이다. 그는 자신이 “성격이 졸렬하지만 오직 책 보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아왔다”고 말한다. “사는 방은 작지만 동·서·남쪽으로 창이 나 있어 해를 따라 밝은 데서 책을 봤다”는 일상의 묘사도 책을 좋아하는 면모를 부각시키는 대목이다.

“4년 동안 마음을 써서 일만여 수가 되었지만… 깨진 기와와 무너진 담장에 그림장식한 것보다 조금 나을 것입니다. 마침내 억지로 ‘계원집’ 20권을 이루었습니다.”

9세기 말의 문인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신라 헌강왕에게 헌정한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서문의 한 대목이다. 왕에게 경력을 설명하는 자기소개서라고 할 수 있다. 겸손한 듯 자신의 책을 소개하지만 자부심이 묻어난다. 이때는 아직 신라에서 그의 뜻이 좌절하기 전이었다. 이수광의 장편 시 ‘술회오백칠십언(述懷五百七十言)’은 대조적이다. 그는 “고금은 손가락 한번 튕기는 시간이요/천지는 하나의 여관일 뿐/몸뚱이는 하늘과 땅 사이에 부쳐 살아/자그마한 하나의 부평초에 불과하다/누가 인생 백년 사이에/자질구레하게 넉넉함을 억지로 구하랴”라고 노래한다. 광해군과 인조를 거치며 벼슬을 하다 그만두길 반복했던 그의 삶이 엿보인다.

이처럼 당대 문인들의 자서전에는 삶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이루지 못한 일에 대한 안타까움과 자조도 녹아 있다. 책의 저자인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는 서문에서 “청운의 꿈을 꾸며 기쁨이 충만하던 시절을 추억하는 분, 나를 배반하는 많은 것들 때문에 망망함을 느끼는 분, 그분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분들에게, 자서전을 작성해보시라고 권한다. 자서전을 쓰는 일은 자기의 존재의의를 확인하는 가장 유력한 기획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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