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에서 수영을 즐긴 뒤 막 샤워장으로 들어가려는 참일까? 복부비만이 확실시 되는 메릴린 먼로의 비키니 차림을 보는 순간 웃음을 참기 힘들다. 다른 작품에선 통통한 몸매를 자랑하는 모나리자와 나이 든 피카소가 서로를 힐끔거린다. 모처럼의 나들이를 위해 한껏 모양낸 대한민국 아줌마들의 당당한 패션도 볼거리다.
5월 21일까지 서울 강남구 논현동 갤러리로얄(로얄빌딩 2층)에서 열리는 화가 최석운 씨(50)의 ‘나는 잘 있다’전 풍경이다. 풍자와 해학이 담긴 그림들은 명작의 모델이든 20세기 거장이든 할리우드 슈퍼스타든 한 꺼풀 벗기면 모두 인간이고 평범한 존재임을 일깨워준다. 02-514-1248
천연덕스러움과 낙천성이 스며든 최 씨의 그림과 마찬가지로 일상의 영역을 소재로 다루면서 건강한 웃음과 에너지를 충전해주는 전시를 만났다. 서울 대학로 샘터갤러리(샘터사옥)가 5월 23일까지 마련하는 나무 조각가 한선현 씨(42)의 ‘염소의 꿈, 만들다’전. 사람을 빼닮은 염소를 주인공으로 삼은 전시다. 해학과 유머로 현실과 상상이 어우러진 세계를 펼쳐낸다. 02-3675-3737
세상이 알아주든 말든 끈질기게 자신의 내공을 갈고 닦은 중견 작가들의 전시는 생동감이 넘친다. 난해한 현대미술에 식상한 보통사람들과 눈높이를 맞추면서도 작품의 밀도와 메시지는 녹록지 않다. 기발한 아이디어로 반짝 주목을 받는 신진 작가들의 작품과 차별화되는 대목이다. 더불어 예술의 치유 기능으로 고단한 현실에서 벗어나 긍정의 힘과 삶의 에너지를 채울 기회를 선사한다.
○ 사막 같은 세상을 살아남는 법
전철에서 입을 헤벌리고 잠에 곯아떨어진 남녀, 하릴없이 분주한 인간들을 측은하게 곁눈질하는 동물들, 길을 걸으면서도 각자 휴대전화로 통화하는 사람들, 뽀글뽀글 파마에 특유의 색채감각으로 ‘꽃단장’한 아줌마들.
최석운 씨는 익숙한 일상의 순간을 날카롭고도 애정 어린 시선으로 포착한다. 일부러 어눌한 듯 평면적으로 그려낸 현대인의 초상을 관통하는 것은 인간적 따스함. 작가는 과도한 절망이나 무모한 낙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려 애쓴다. 그저 통속적 세상의 빛과 그늘을 씨줄날줄로 엮어낸 작품을 통해 사막 같은 세상이지만 다 함께 잘살아 보자고 응원할 뿐이다. 부조리와 가식이 판치는 현실과 드잡이 하면서도 “나는 잘 있다”고 우기는 서민들. 그들이 공유한 ‘평범함의 연대’를 격려하면서.
그래서 화가와 친분 있는 소설가 성석제 씨는 그를 “회화의 인간학자”라고 평하며 이렇게 덧붙인다. “그의 그림은 볼수록 기분이 좋아진다. 우리 역시 그림 속의 남녀노소, 우수마발과 같은 삶을 살고 살아왔고 화사하고 잔잔한 한순간을 누릴 것이기에.”
○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법
“언제나 음매에 소리를 낸다. 뿔과 수염이 매력적이다. 일자 눈동자가 신비스럽고 강렬하다.”
조각가 한선현 씨가 ‘동물의 왕국’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할 가능성이라곤 전혀 없는 초식동물을 캐스팅한 이유다. 돌 조각가를 꿈꾸며 이탈리아 카라라에서 수학하던 중 우연하게 목조장인을 만나 나무 조각에 빠져든 작가. 그는 다양한 나무를 사용한 조각과 부조작품으로 인간미 넘치는 염소의 희로애락을 표현한다.
코가 길게 자란 피노키오가 중앙에 자리한 전시장을 한 바퀴 둘러보면 어른을 위한 유쾌한 동화를 읽은 느낌이다. 그중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법을 일러주는 작품이 있다. 먼저 가고 싶은 상대의 마음을 읽고 양보하는 염소의 아름다운 영혼은 사소한 일에 핏대를 올리는 인간세상을 돌아보게 한다.
전시장을 떠날 때 늘 미소를 잃지 않는 지혜롭고 순한 염소들이 묻는 것 같다. “당신은 외나무다리를 어떻게 건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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