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외지게 곰팡이가 피었다. 쉰내 나게 가난한 남자 주세희(김용준)와 성냥개비처럼 타들어가는 그의 엄마 임용순(백현주)이 그 주인공이다. 공장 말단직원인 아들은 불혹의 나이에 진짜 사랑에 빠졌는데 하필이면 그 상대가 남자다. TV드라마 보면서 종이꽃 만들어 살아가는 어미는 자궁암에 걸린 시한부 인생이다. 돈이 없어 변변한 치료도 못 받는데 어미는 보이스피싱에 속아 돈을 날리고, 아들은 의료사기에 속아 적금을 털린다.
어수룩한 아들은 ‘C레이’를 방출해 암세포를 수면에 빠지게 한다는 ‘지능형 티셔츠’를 입은 어미의 배 속에서 사기단이 미리 찍어둔 태아의 영상이 나타나자 아기 아빠가 누구냐고 캐묻는다. 웃음이 터진다. 잠결에 아들이 동성애자라고 고백한 것을 들은 어미는 아들과 동반자살을 기도한다. 하지만 독이 탄 식혜를 먹은 아들은 “식혜가 아리다”며 어미 몫의 식혜를 얼결에 버린다. 이를 보고 입맛 다시는 어미의 표정에서 다시 웃음이 터진다.
서울 남산예술센터의 신진연출가 기획전 첫무대인 ‘당신의 잠’은 그렇게 신문 사회면에 조그맣게 실릴 비루한 인생을 무대로 끌고 올라온다. 보통사람들이 혀 한 번 끌끌 차거나 “엽기적”이라며 웃고 넘어갈 인생이다. 우리는 그 사건을 TV 일일드라마보다 못하게 소비해버리면서 정작 그 주인공들에게 얼마나 절박한 것인지를 간과한다. 작가이자 연출가인 동이향 씨는 그런 사건 뒤에 숨어있는 비극성을 예민하게 포착한다.
남들의 눈에 한없이 추레한 사랑이 그 사람에겐 필생의 사랑일 수 있다. 중산층에겐 몇 푼 안돼 보이는 돈이 서민에겐 목숨 값일 수 있다. 심지어 “난 네가 되어가. 독약처럼 네가 번져”라는 드라마의 달짝지근한 대사가 그들에겐 끔찍한 현실이 될 수도 있다.
40대 동성애자 아들과 말기암 걸린 엄마 통해 죽음의 의미 새롭게 조명
이 연극의 매력은 그런 현실을 망각하거나 외면한 우리의 죄책감을 일깨우는 데 있지 않다. 변두리 인생을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처럼 보편적 삶의 주인공으로 형상화해낸 데 있다. 주세희의 사랑은 좌절할 수밖에 없는 운명적 사랑이고, 임용순의 죽음은 그 누구도 대신 겪어줄 수 없는 본질적 고독이다.
연극의 제목 ‘당신의 잠’은 인간존재의 근원적 심연을 상징한다. 나의 잠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온전히 나만의 것이듯 타인의 잠 역시 내가 아무리 몸부림쳐도 끼어들 수 없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잠은 곧 인생이고 죽음이다. 누가 내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없듯이 죽음의 경험만은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온전히 내 것이니까.
찢어진 신문지 조각 속 곰팡내 나는 인생을 그리스 비극으로 발효시키는 힘은 주옥같은 대사에서 나온다. 어쩌면 단 한 번뿐일 사랑과 작별하면서 주세희는 독백조로 말한다. “너도 그리움을 앓아봐라. 나 없이. 너 없이. 너 없는 나 없이.” 불 꺼진 방에서 시간을 뜯어먹는 암세포와 싸우던 임용순은 말한다. “불 꺼지면 냄새 나. 촛불 켰을 때 나는 냄새. 뼈가 타는 것 같은. 시커먼 것은 뜨거워. 그 어둠에 누구도 데이지 않아. 막 꺼진 불에는 누구도 데이지 않아. 나한테 누구도 데이지 않아.”
주세희와 임용순뿐 아니다. 한결같이 ‘상처 잃은 피딱지’ 같은 연극 속 등장인물들은 혼잣말처럼 인생의 비의(秘意)를 읊는다. 열두 달째 임신 중인 여자 사기꾼 김경희(박성연)는 “뭐든 처음엔 속아 주는 거예요. 속아 주다 보면 속게 돼. 속으면 믿게 돼. 그게 믿음”이란 말로 현실을 농락하는 환상의 힘을 말한다. 바람난 이모 순자를 목 졸라 죽인 주세희의 이모부(성노진)는 “불타지 않을 때 우린 물건이죠. 그 시간 순자는 타 올랐겠죠”라며 불륜 자체보다 뜨겁게 살 수 있다는 것 자체에 대한 질투심을 토로한다.
주세희의 대사가 자장가처럼 그들을 위무하듯 내려앉는다. “몸 가는 데로 마음이 못 가니까 병이 되고, 마음 가는 데로 몸이 안 가니까 꿈이 된대. 그래서 아프면 자는 거야.” 굿 나이트, 사랑아. 굿 나이트 인생아.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i: 1만5000∼2만5000원. 5월 2일까지 서울 중구 예장동 남산예술센터. 02-758-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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