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한공연 전 여러 인터뷰에서 “천안함 희생자들을 위해 연주하겠다”고 밝힌 게리 무어의 약속은 허언이 아니었다. 4월 30일 밤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펜싱경기장에서 열린 첫 내한공연에서 그는 추모의 의미로 최고 히트곡 ‘스틸 갓 더 블루스’를 연주하고 노래했다. 순식간에 장내에는 침묵이 흘렀지만 누구 하나 허투루 그의 동작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흐느끼고, 애무하고, 울부짖고, 토해내고. 그의 기타는 불가능을 모르는 만능 블루스 소리샘이었다. ‘이제부터 어디 가서 기타 좀 만져 봤다는 얘기하면 절대 안 되겠구나.’ 본능과도 같은 빨간 경보가 머릿속에서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얼마 전 열렸던 기타리스트 제프 벡의 공연에 이은 두 번째 깨달음이었다.
재즈 록 밴드 ‘블러드, 스웨트 앤드 티어스’의 원곡을 리메이크한 ‘아이 러브 유 모어 댄 유 윌 에버 노’를 포함해 ‘해브 유 허드’ ‘다운 더 라인’ 등 주로 2000년 이후 발표한 노래들을 선보였음에도 관객들이 끝까지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게 하는 집중력도 대단했다. 오로지 ‘스틸 갓 더 블루스’와 ‘파리지엔 워크웨이스’만을 고대하며 온 팬들도 친숙하지 않은 노래에 아낌없는 박수 세례와 환호성을 보냈다. ‘파리지엔 워크웨이스’의 장렬한 기타 솔로를 끝으로 두 번째 앙코르를 마친 그는 열광적인 반응을 뒤로한 채 퇴장했다.
어느 문화 평론가의 말처럼 “충분히 발전한 그의 기술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었다.” 게리 무어에게 테크닉이나 코드 같은 이론은 무의미했다. 손가락을 광속으로 돌리는 극한의 스피드 게임 역시 그에게는 아이들 장난일 뿐이었다. 규정집 따위를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좀 더 자유로운 연주가 가능함을 그는 이번 공연으로 대변해줬다. 가장 높이 오르고 가장 멀리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은 결국 모든 굴레로부터 벗어나는 음악적 파계(派系)에 있음을, 자신의 기타 하나로 명증한 것이었다.
공연장을 빠져나가는 관객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밝아 보였다. 구슬픈 블루스 음계를 연주하던 게리 무어의 일그러진 표정과 흘러내리는 땀 속에서 아티스트의 진정성과 대면한 까닭이었다. 그의 연주에는 속도와 밀도가 공존했고, 강렬한 이미지들이 선도와 강도를 겸비한 채 담겨 있었다. 일단 몰입하면 빠져나오기 어려운 블루스의 늪이었다. 그것은 진실로, 게리 무어라는 전설을 심장으로 삼았던 한 편의 드라마틱한 블루스 서사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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