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노희경 원작 연극 ‘… 가장 아름다운 이별’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5월 4일 03시 00분


며느리,아내,엄마… 그 채울 수 없는 빈자리

연기 ★★★☆ 연출 ★★☆ 무대 ★★☆

인기 TV드라마 연극으로
주연 정애리 열연 인상적

장면 이어붙이기 바빠
원작 못살린 연출 아쉬워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를 연극무대로 옮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여주인공 인희 역의 정애리 씨(왼쪽) 등의 뛰어난 연기로 관객이 눈물은 훔치지만 드라마의 예술적 성취를 무대 위에서 펼쳐내는 데는 한계를 보였다. 사진 제공 연극열전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를 연극무대로 옮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여주인공 인희 역의 정애리 씨(왼쪽) 등의 뛰어난 연기로 관객이 눈물은 훔치지만 드라마의 예술적 성취를 무대 위에서 펼쳐내는 데는 한계를 보였다. 사진 제공 연극열전
영상매체가 산문이라면 공연은 시다. 영상의 미덕은 이야기의 현장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반면 공연은 무대라는 제한된 공간 속에 이야기를 재구성한다. 모든 사건을 무대 위에서 보여주지 못하는 대신 무대 밖에서 벌어진 사건은 목격담 내지 후일담 형태로 무대 안에 녹여내야 한다. 공연의 한계인 동시에 매력이다.

영상 강국인 한국에서 영화나 방송 히트작이 공연으로 제작될 때 평단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는 경우가 드문 것도 이 점과 관계 있다. 공간에 구애받지 않는 영상문법에서 벗어나 제한된 공간 속에서 이야기를 응축 발효시키는 공연문법에 충실한 작품으로 변신에 성공하는 작품이 드물기 때문이다.

방송작가 노희경 원작의 동명 드라마(1996년)를 연극무대로 옮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연출 이재규)은 이 문제를 정공법으로 돌파하려 한다. 원작이 지닌 이야기의 힘과 배우의 연기력으로 정직하게 밀어붙이는 것이다.

인희(정애리)는 가족에겐 없어서 안 될 존재다.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이용이)의 전담 마크맨이자 의료사고 때문에 평생 월급쟁이 의사로 살아야 하는 처지를 비관해온 남편(최정우)의 온갖 불평을 다 받아주는 샌드백이다. 직장생활을 막 시작한 맏딸(박윤서)과 재수생인 아들(이현응)에겐 자질구레한 일을 도맡아 처리해 주는 해결사다. 사고뭉치 남동생 근덕(전배수)에겐 언제든 손 내밀 수 있는 보험과 같다.

그런 그가 자궁암 말기 판정을 받는다. 가족들은 그제야 그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을 깨닫고 어쩔 줄 모른다. 그 와중에서도 인희는 자신의 부재로 인해 고통 받을 가족 걱정뿐이다. 급기야 자신이 없으면 천덕꾸러기가 될 시어머니의 목을 조른다. “나 살았을 때 어머니가 죽어야 어머니도 편하고, 그래야 나도 편히 눈을 감지”라며.

정애리 씨는 TV 드라마에서 나문희 씨가 맡았던 수더분하면서 정 많은 인희를 속 깊고 깔끔한 인희로 변신시키면서 군더더기 없이 정확한 연기로 눈물을 끌어낸다. 돌부처처럼 무뚝뚝한 얼굴로 아내에 대한 진한 사랑을 표현 못해 쩔쩔 매는 남편 정 박사 역 최정우 씨의 연기도 탄탄하다.

연출가인 이재규 PD는 독특한 영상미로 승부를 건 TV 드라마 ‘다모’와 ‘베토벤 바이러스’의 연출자다. 그런 그가 인희의 X선 촬영 장면조차 배우의 실루엣을 쓸 정도로 영상을 배제하며 담백한 연기로만 승부를 건 점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렇지만 드라마의 대사와 구성을 거의 그대로 무대로 가져온 것은 정직한 게 아니라 순진한 것이다. 인희의 2층집을 토대로 4분할된 무대공간은 병원과 근덕의 집, 길거리, 일산 새집으로 영상의 장면 장면을 포착하기 바빠서 무대미학의 참맛을 보여주지 못한다. 독창적 무대미학이 빠진 연극은 천편일률적 영상의 드라마를 보는 것과 같다.

게다가 장면과 장면을 쫓아가기 바빠 배우나 관객이 극의 흐름을 음미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영상문법으로 표현하자면 호흡이 긴 롱 테이크로 가야 할 장면을 쇼트 컷들을 이어붙인 몽타주 기법으로 편집한 결과를 낳은 셈이다.

무엇보다도 이 연극은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드는 힘이 부족하다. 노희경 드라마가 각광받은 것은 아무리 익숙한 이야기라도 결코 익숙한 방식으로 답보하지 않았기 때문임을 연극이 된 드라마는 간과하고 있다. 웃음이 곧 흥행이 아니듯, 눈물이 곧 예술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인희 역으로 송옥숙 씨, 정 박사 역으로 최일화 씨, 근덕 역으로 박철민 씨가 교체 출연한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i: 3만∼5만 원. 7월 18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문화공간 이다1관. 02-766-6007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