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백건우 씨가 브람스의 협주곡 1번을 녹음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대뜸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개 속을 헤치는 듯한 스산한 첫 악장이나 계시적(啓示的)인 두 번째 악장과 그의 음색이 잘 맞을 듯했기 때문이다. 3일 도착한 음반에서 그 같은 기대가 맞았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백 씨가 DG(도이체 그라모폰) 레이블로 처음 내놓은 앨범이다. 협주곡 1번 외 브람스의 ‘창작 주제에 의한 변주곡’ ‘현악 6중주 변주곡’ 피아노 편곡판을 실었다.
백 씨의 터치는 관현악을 앞서 달려가는 일이 드물다. 주변의 물기를 빨아들여 스스로 윤택해지는 듯한 그의 타건(打鍵)은 ‘우리 이 음을 다 채우고 느끼고 가자’며 관현악을 다독인다. 관현악과의 호흡이 완벽하지 않을 경우에는 자칫 둔중하게 느껴질 우려도 있지만 이 음반에서는 아니다. 백 씨와 20년 넘게 호흡을 맞추며 유럽 순회공연도 함께 했던 지휘자 엘리아후 인발은 1악장 서두부터 백 씨의 등장을 위한 가장 알맞은 색채의 관현악 카펫을 깔아놓는다.
현악 6중주 변주곡 편곡판에서는 허식을 배제한 시종여일함이 돋보인다. 각 변주 사이의 강약 또는 속도대비나, 상행음형과 하행음형 간의 대조에서 그는 꼭 필요한 만큼만을 남겨두었다.
백 씨는 줄리아드음악원 유학 시절 영국 영화 ‘L자 모양 방’에 나온 브람스 협주곡 1번을 듣다가 매료돼 곧바로 연습에 돌입했다고 말했다. 굽은 방을 무대로 사랑을 키우던 두 남녀는 결국 여건 때문에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헤어진다. 그 영화 내용과 브람스의 삶에는 닮은 점이 있다. 깊은 사랑을 결국 실현하지 못한 ‘씁쓸함’의 뒷맛이다.
백 씨의 신중하고 내성적인 면모는 브람스와 닮았다. 음반 표지 사진은 이 점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양 발이 옆으로 향한 채 어깨를 구부정히 하고 서 있는 사진은 19세기 삽화가가 그린 브람스의 캐리커처와 비슷하다. 캐리커처에는 브람스가 즐겨 찾았던 술집 이름이자 그의 까칠함을 나타냈던 ‘고슴도치’가 동반되곤 했다.
다른 점도 있다. 백 씨는 현실에서 행복한 사랑을 실현했다. 3일 기자간담회에서 만난 그는 부인 윤정희 씨가 출연한 영화 ‘시’를 본 감상을 묻자 조심스러운 말투로 “대단한 배우다. 평소에 숨겨져 있던 열정이 어디서 그렇게 솟구치는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말을 한 뒤 씩 웃는 그의 웃음 속에 씁쓸한 브람스는 없었다.
백 씨는 29일 오후 8시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파보 예르비 지휘 프랑크푸르트 방송교향악단 내한연주회에서 앨범에 수록된 브람스 협주곡 1번을 협연한다. 드보르자크 교향곡 9번 ‘신세계에서’도 이날 연주된다. 5만∼20만 원. 02-599-5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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