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비종 마을의 만종 같은/저녁 종소리가/천도복숭아 빛깔로/포구를 물들일 때/하루치의 이삭을 주신/모르는 분을 위해/무릎 꿇어 개펄에 입 맞추는/간절함이여/거룩하여라/호미 든 아낙네의 옆모습’
<이가림의 ‘바지락 줍는 사람들’에서>
바지락은 줍는가? 캐는가? 줍는 것이라면 왜 호미를 들고 개펄에 나갈까? 시인은 왜 ‘바지락을 줍는다’고 했을까? 노을이 붉게 물들면, 거무튀튀한 개펄도 ‘천도복숭아처럼 발그레’ 달아오른다. 그 속에서 개펄에 코를 박고, 정신없이 바지락을 캐고 있는 보살들. ‘하루치의 이삭을 주신 신에게 감사기도를 드리는 듯한’ 간절함. 밀레의 그림 ‘만종’에 나오는 이삭 줍는 사람들이나 똑같은 모습이다. 시인에게 바지락을 ‘캔다’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다. 아낙네들은 다만 신이 뿌려놓은 바지락을 ‘줍는’ 것이다.
요즘 남서해안 개펄에 바지락이 바글바글하다. 아낙네들이 호미질 할 때마다 “바지락 바지락” 소리가 난다. 호미날에 바지락껍데기 닿는 소리다. 고무장화를 신은 아낙네들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밑에서 “바지락 바지락” 바지락껍데기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바지락칼국수를 먹을 때 수북이 쌓이는 바지락무더기에서도 “바지락”소리가 난다. 입 벌린 껍데기들끼리 부딪치는 소리다. 사람들은 바지락 속살만 이빨로 살짝 떼어 먹고, 상 위에 어지럽게 패총을 만든다.
바지락은 4∼6월이 제철이다. 산란기를 앞두고 속살이 탱탱하게 꽉 찼다. 6월이 지나 장마철이 오면 젓갈로나 쓰인다. 어민들은 개펄의 양식장에서 바지락을 키운다. 종패를 뿌린 뒤 호미로 군데군데 움푹하게 파주면 바지락종패가 그곳에 기어들어가 산다. 지난겨울은 추위가 맵고 길었다. 올봄 바지락 씨알이 예년보다 작은 이유다.
바지락은 노약자 임산부 어린이 등에게 꼭 필요한 철분과 아연이 풍부하다. 뽀얗게 우려낸 바지락국물은 술꾼들 속 풀기에 안성맞춤이다. 간 보호와 황달에 좋다. 바지락 속에 들어 있는 글리코겐이 간을 보호하고, 메티오닌 시스틴 등 아미노산이 해독작용을 한다. 콜레스테롤 흡수를 방해하는 타우린 성분도 들어 있다. 바지락껍데기는 칼슘 덩어리이다. 식은땀을 자주 흘리는 약골들에게 달여 먹이면 좋다. 껍데기를 말린 뒤 가루로 빻아 헝겊주머니에 넣고 팔팔 끓이면 된다. 신장이 나쁘거나 오줌소태에도 바지락 국물이 효과가 있다.
조개는 3가지가 있다. 첫째 껍데기가 나사모양인 것(고동), 둘째 껍데기가 두 장인 것(대합 홍합 바지락 꼬막), 셋째 껍데기가 한쪽에만 붙어 있는 것(전복)이다. 바지락은 조개 종류에서 가장 흔하고 싸서 널리 쓰인다. 굴 홍합 다음으로 많이 나는 조개다. 개펄에 가보면 흔전만전이다. 바닷가 어느 마을이나 껍데기가 널려 있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지만, 모든 조개는 죽어 ‘국물 맛’을 남긴다. 바지락 모시조개 재첩 대합 등은 국물 맛내는 데 으뜸이다. 찌개나 해장국에 재료로 많이 쓴다. 가령 모시조개는 감칠맛을 내는 호박산이 다른 조개의 10배이다. 글리시닌이 많아 단맛도 잘 난다. 봄에 된장 풀어 끓이는 냉잇국 쑥국 시금칫국 등에 잘 어울린다.
바지락은 천연조미료이다. 달면서도 시원한 감칠맛을 듬뿍 내준다. 된장국 칼국수 등에 바지락 몇 개만 넣으면 구수하고 시원한 맛이 새록새록 우러나온다. 바지락국은 소금으로 간을 하고 팔팔 물이 끓을 때 바지락을 넣는다. 금세 허연 쌀뜨물 같은 것이 우러나온다. 여기에 파와 청양고추를 송송 썰어 넣고, 파 부추 콩나물 등을 취향에 따라 넣어 먹으면 된다. 바지락이 끓을 때 위에 떠오르는 거품은 수저로 걷어내는 게 좋다. 참고로 냉동조개를 찬물에 넣은 채 끓이면 껍데기가 벌어지지 않으므로 꼭 물이 끓을 때 넣어야 한다.
조개는 모래를 토해내게 해야 한다. 바닷물과 비슷한 염도의 소금물에 하룻밤 정도 담가 놓으면 된다. 맹물은 조개가 숨을 쉬기 어렵기 때문에 해감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민물에서 잡히는 재첩은 맹물에서 빼야 한다.
바지락무침은 입안에 쩍쩍 달라붙는다. 새콤달콤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다. 갓 캐어낸 바지락에 돌미나리 배 오이 양파 참나물 등을 넣고, 양념장으로 무쳐내면 된다. 막걸리식초와 매실 엑기스도 빠지면 안 된다. 목포 해촌식당(061-283-7011)이 이름났다.
바지락죽은 바지락에 찹쌀 애호박 다진마늘 참기름 소금 통깨 등을 넣어 끓인 것이다. 부안변산의 식당 원조바지락죽(063-583-9763)에선 뽕잎가루를 넣은 뽕잎바지락죽이 유명하다. 뽕잎가루반죽에 더덕을 넣어 부친 뽕잎바지락전과 뽕잎바지락무침도 눈길을 끈다. 부안 변산온천산장바지락죽집(063-584-4874)에선 쌀 녹두 바지락에 당근 파 마늘 등을 넣는다.
5월엔 입맛조차 푸르다. 혀끝에 기름이 자르르 돋는다. 이제 3, 4월 연둣빛 풋것들은 심심하다. 농사철에 맞춰 푸른 비 ‘녹우(綠雨)’가 내린다. 이럴 땐 온 식구 둘러앉아 바지락칼국수점심이 먹고 싶다. 커다란 냉면 그릇에 가득 담겨 나오는 칼국수. 바지락 반, 칼국수 반에 언뜻언뜻 보이는 연둣빛 애호박 채. 뽀얀 국물에 황갈색의 바지락껍데기 그리고 둥근 그릇이 보기만 해도 배부르다.
바지락칼국수를 먹으면 왜 그렇게 트림이나 방귀가 잦을까? 배 속에서 가스가 나올 때마다 시큼털털한 개펄냄새가 난다. 바지락냄새가 바글바글 풍긴다. “바지락바지락” 꿈틀대는 소리가 들린다. 아무래도 내 배 속 개펄에서 바지락이 뿌리를 내리고 사는 가보다.
‘어금니 갈아 끼우는 동안/한 달 가까이 조개속살을 먹고 살았다/…그중에도 제일로 많이 먹은 게/흔하고 값싸고 맛있는 바지락이다/먹을 때는 전혀 몰랐는데 삼시세끼 조갯살만 먹고/한 일주일 지나면서부터는 트림을 하거나/방구가 나올 때마다 희한하게도 그 속에서/매콤시큼한 개펄냄새가 나곤 했다’ <정양의 ‘개펄냄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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