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이야기]<892>微子는 去之하고 箕子는 爲之奴하고 比干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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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5월 7일 03시 00분


은나라 말에 微子(미자)는 떠나고 箕子(기자)는 종이 되고 比干(비간)은 간하다가 죽었다. 공자는 “은나라에 세 어진 이가 있었다”고 말했다.

‘논어’ ‘微子’편의 첫 장이다. 은나라 말의 혼란기에 仁의 덕을 실천한 微子, 箕子, 比干의 사실을 기록하고 공자의 논평을 덧붙였다.

微子는 이름이 啓(계)이다. 은나라 帝乙(제을)의 장남으로 은나라 마지막 왕인 紂(주)의 이복형이다. 紂를 諫(간)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자 조상을 제사 지내는 제기들을 갖고 山西省 潞城(노성) 동북쪽에 있던 微(미) 땅으로 갔다. 周나라 武王이 紂를 정벌하자 항복했는데, 무왕은 그를 微國에 봉하고 子爵(자작)의 지위를 주었다. 그래서 微子라고 한다. 뒤에 은나라의 뒤를 이어 宋에 봉해졌다.

箕子는 이름이 胥余(서여)로, 紂의 아저씨다. 紂를 간했으나 듣지 않자, 거짓으로 미친 척하다가 奴隸(노예)의 신분으로 전락해서 숨어 지냈다. 주나라 무왕은 紂를 정벌한 후 기자에게 천하를 다스릴 방책을 물었는데, 이때 기자는 洪範(홍범)을 진언했다고 한다. ‘사기’에는 기자가 朝鮮에 봉해졌다고 되어 있다. 爲之奴는 紂의 노예가 되었다는 말이다.

比干도 紂의 아저씨다. 미자가 떠나고 기자가 노예가 된 후 비간은 紂를 강력하게 간했다. 그러자 紂는 ‘성인의 심장에는 일곱 개 구멍이 있다고 하니 심장을 열어보자’ 하고는 비간을 죽이고 심장을 열어보았다고 한다. 은나라는 기원전 1100년 무렵에 멸망당했다.

微子 箕子 比干은 지성으로 군주를 섬기고 나라를 사랑했던 어진 이였다. 정약용은 세 사람의 행위가 서로 다르지만 모두 충효의 행위가 義에 합치했으므로 그들의 仁은 똑같다고 부연했다. 亂世에는 민족을 위하는 正義를 실천해야 진정 어진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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