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오후 부산 광안리해수욕장 인근의 막걸리집 ‘소담골’. 원로 시인 허만하 씨에 이어 김참 김형술 정익진 조말선 씨 등 젊은 시인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서울 인사동도 그렇잖소. 미운 놈 욕하고, 술 먹고 잡담하려고 문인들이 모이듯 우리는 여기서 뭉치는 거지!” 허 시인이 웃으며 말했다.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편하게 만나게 된 게 5년이 돼 가요.” 홍일점인 조말선 시인이 거들었다.
막걸리에 맥주까지 한 잔씩 돌자 분위기가 점차 무르익는다. 세대도, 등단 연도도 천차만별인 데다 동일한 문학적 기치를 내건 동인도 아닌 이들은 이 모임을 ‘세드나(Sedna)’라고 부른다. 에스키모 신화의 바닷속 여신을 지칭하는 단어이자 아직 명확히 규정되지 않은 행성을 이르는 말이다. 그야말로 바다와 함께 살면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행성’이랄 수 있는 부산 출신 모더니즘 시인들의 모임을 가리킨다.
이들이 어울리기 시작한 것은 2005년 무렵. 허만하 김언 김참 김형술 박형섭 정익진 조말선 씨 등 모더니즘적 성향이 강한 시인들이 모였다. 몸이 불편한 허 시인의 자택에서 가까운 소담골을 단골집으로 삼고 한 달에 몇 번씩 산발적으로 모임을 갖는다. ‘세드나’란 이름도 허 시인이 붙였다. 후배 시인들은 농담 삼아 구시렁댄다. “선생님은 상도 많이 받으셨고, 이미 ‘발견된 행성’ 같은데예….”
6·25전쟁 중 임시수도였던 부산은 도시적 삶과 일그러진 문명을 비판하는 모더니즘 계열의 시가 나오기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이 때문에 지금도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시를 꾸준히 생산해내는 전통이 있다. 지난해 박목월문학상을 받은 허만하 시인과 미당문학상을 수상한 김언 시인을 비롯해 ‘현대시 동인상’을 수상한 김참 조말선 시인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성과에 비해 비평적 조명은 미미한 편이었다.
자연히 이들이 모여 술잔을 앞에 두고 쏟아내는 이야기도 이 언저리를 맴돈다. 모더니즘 시에 대한 난상토론뿐 아니라 서로의 시에 대한 ‘질투와 비난’도 난무한다. “6·25 이후 문단에는 이런 모임이 많았어. 사르트르가 파리의 카페에서 그랬듯이. 상상력이란 토론하고 이야기하면서 생겨나는 것이지. 하지만 지금은 그런 문화가 거의 사라졌으니까.” 허 시인의 말을 정익진 시인이 받았다. “대놓고 서로 ‘니는 시가 그게 머꼬, 제대로 좀 써봐라’고 일갈도 하지예. 허 선생도 어찌나 독하게 말씀하시는지 가끔은 후배 시인들이 웁니더.” 후배 시인들은 “여전히 ‘젊은 시인’인 허 선생의 열정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고 말했다.
꾸준히 이어져온 술자리는 최근 단행본 ‘기괴한 서커스’(사문난적)라는 결실을 낳았다. 신작시, 비평, 산문 등을 모은 책이지만 동인지도 무크지도 아니어서 이 모임의 개성만큼이나 딱히 성격을 규정짓기 힘들다.
4년 전쯤 김형술 시인이 “술만 마시지 말고 기록을 남기자”고 제안했지만 모두들 시큰둥해했다. 허 시인이 “부산 모더니즘 시만의 독특한 지점을 보여줘야 한다”고 환영하면서 1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출간 준비가 시작됐다. 한국 모더니즘의 발생과정을 추적한 글에서부터 부산 모더니즘 시 기원과 계보를 시대별로 일별한 산문, 일상적 에세이까지 다양한 글을 수록했다. 물론 여기서 모더니즘이란 포스트모던적 특징까지 포괄하는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시를 뜻한다.
조 시인은 “다음 책은 정말 ‘듣도 보도 못한 책’으로 준비하려고 다들 벌써부터 준비 중”이라고 귀띔했다. 1년에 한두 차례 ‘세드나’란 이름으로 책을 펴낼 계획이다.
“가끔 서울 시인들 이야기를 들으면 시를 무슨 사업하듯이 청탁 받으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한다던데… 지방에 조용히 틀어박혀 좋은 시 쓰고 있는 시인들도 찾아봐 주면 좋겠슴니더.” 김형술 시인이 막걸리를 건네며 말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