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반, 조선 문인 사이에서 중국 북송 때의 시인 소동파(蘇東坡·1037∼1101)를 기리고 그 시풍을 따르는 이른바 ‘소동파 열풍’이 불었다. 소동파의 생일인 12월 19일에는 그를 위한 제사인 동파제가 열렸고, 소동파 시문집과 초상화 수집이 유행했다. 유독 19세기 중반 조선의 문인들이 소동파 열풍을 앓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정민 한양대 교수가 그 배경을 탐색했다. 정 교수는 26∼28일 대만 국립대만예술대에서 열리는 ‘동아 금석전각예술 국제학술대회’를 통해 ‘19세기 조선 지식인의 모소열(慕蘇熱)과 보소당인존(寶蘇堂印存)’을 발표한다.
정 교수에 따르면 소동파 열풍의 진원지는 청대의 대학자이자 금석학자인 옹방강(翁方綱·1733∼1818)이었다. 그는 자신의 서재 이름을 ‘보소당(寶蘇堂·소동파를 보배롭게 여기는 집)’이라고 짓는 등 소동파에 열광한 인물.
정 교수는 그의 영향으로 당시 조선 문인 사이에 소동파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고 분석한다. 옹방강과 최초로 만난 조선 문인은 박제가였으며 이 관계는 박제가의 제자인 김정희로 이어졌다. 정 교수는 “박제가 이전에는 조선 문인이 청대의 유명 문인과 교분을 나눈 예가 드물었기 때문에 그 여파가 컸다”며 “소동파를 기리고 따른다는 것 자체가 청나라 학자들과 연계돼 있음을 나타내는 지식인들의 중요한 표징이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열풍은 왕실로 이어졌다. 헌종 때 편찬된 ‘보소당인존’이 대표적인 예. 왕실에서 사용되던 도장과 헌종이 개인적으로 수집한 도장에 관해 기록한 책이다. 여기서 보소당, 보소재 등 소동파와 관련된 인장이 전체의 약 4분의 1에 이른다. ‘보소당’은 헌종이 자신의 처소에 붙인 당호이기도 하다. 헌종 역시 소동파 열풍에 동참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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